장재형목사 – 사람 낚는 어부의 소명

Ⅰ. 교회 봉헌의 기초: 예수 그리스도의 터

우리가 교회를 봉헌하고, 곳곳에 예배처소를 세우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견고한 터 위에 우리의 믿음과 소망을 올려놓고자 함입니다. 성경 고린도전서 3장 10~11절에 사도 바울이 말한 바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모든 교회 봉헌의 출발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위에 기초를 두는 일입니다. 이것이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큰 돈을 들여 웅장한 건축물을 지어도, 그곳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사라져 있다면 어떤 의미가 있겠습니까? 건물의 규모나 교세가 아무리 커도, 예수 그리스도의 터가 아니라 다른 가치에 기초해 있다면 결국 비바람이 몰아치고 시험이 올 때 무너져 내리게 됩니다.

우리의 건물과 공동체가 얼마나 견고하게 유지될 것이냐는, 바로 이 ‘기초’를 어디에 두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황금률(마태복음7장 12절)을 예수님께서 설파하신 뒤에 덧붙이신 비유가 있습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집의 외관만 보고 “멋지다”, “견고하다” 하고 찬사를 보내기도 하지만, 실제로 그것이 반석에 지어졌는지는 외부에서 쉽게 알아차리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다만 폭우가 쏟아져서 물이 차오르고 바람이 강하게 불 때가 오면, 어떤 집이 반석 위에 서 있고 어떤 집이 모래 위에 세워져 있는지가 드러나게 됩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봉헌하고, 또 다른 지역에 교회를 확장해 가는 움직임을 볼 때 우리는 무엇보다 “이 교회가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지어졌는가?” 하고 질문해야 합니다. 돈이나 명예나 교권을 기초로 세워진 공동체가 아니라, 철저히 그리스도의 복음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 계속해서 살펴봐야 합니다. 초대 교회도 그렇고, 종교개혁 시대를 거치면서 참된 교회가 어디에 세워졌는가를 두고 오랜 분쟁과 시험이 있어 왔습니다. 결국 역사를 돌아보면, 단순히 제도나 건물의 규모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터가 실재하는가”가 공동체의 생존과 부흥을 결정지었습니다.

장재형(장다윗)목사께서도 항상 교회를 세울 때마다 강조해 오신 핵심 가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기초였습니다. 교회 봉헌 예배를 드릴 때나, 타국에 새로운 교회를 열 때나, 말씀을 선포할 때나 동일하게 반복되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건물이나 지역, 혹은 조직의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실제로 이 예수님의 구원과 말씀에 기초해 있는가”입니다. 구원이 없는 교회, 복음이 희미해진 교회는 결코 하나님 앞에 참 교회로 설 수 없습니다.

사람이 무언가를 건축할 때, 무엇을 제일 먼저 해야 합니까? 땅을 다지고 반석을 찾아 기초를 세워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마치 얼른 눈에 띄는 건축물 형태부터 만들어내야 한다고 생각해서 기초 공사를 소홀히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제 건축 현장에 가보면, 기초 공사는 전체 공사 기간 중 절반 혹은 그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가장 중요한 과정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기초만 제대로 되어 있다면 그 건축물은 시간과 세월의 도전을 버텨낼 힘을 지니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교회 봉헌은, 눈에 보이는 예배당의 외형이나 장식에 앞서 예수님을 모퉁잇돌로 삼고 그분의 말씀을 우리의 근본으로 삼는 일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치장할 수도 있고, 미사여구를 늘어놓을 수도 있지만, 예수님과 떨어져 있다면 그것은 건축물과 공동체가 빛을 잃고 생명을 상실하는 지름길이 될 뿐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12절 이하에서 바울은 교회라는 건축물을 세우는 과정에서 쓰이는 재료들을 언급합니다.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교회를 지어 가면서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게 됩니다. 금이나 은, 보석 같은 귀한 재료가 될 수도 있고, 나무나 풀, 짚처럼 쉽게 구할 수 있지만 불에 타기 쉬운 재료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재료를 사용하느냐는 우리의 헌신과 믿음, 그리고 동기에 달려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요점은 이것입니다. 교회를 세워 나가는 모든 사람은 조심해야 합니다. “과연 내가 어떤 재료를 가지고 이 교회를 세우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교만, 나의 욕심, 나의 높아지고자 하는 마음으로 교회를 세우면 그것은 언젠가 불에 타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겸손과 순종, 희생과 사랑으로 교회를 세우면 그것은 금이나 은처럼 정련되어 더욱 순수하게 빛날 것입니다.

우리가 불시험을 당할 때, 그 공적이 불에 타서 사라지느냐 아니면 더욱 빛을 발하느냐가 결정됩니다. 교회는 세상의 시험을 당합니다. 돈의 시험, 사랑의 시험, 명예의 시험, 여러 가지 유혹과 고난이 몰려옵니다. 교회에 다니는 성도들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시험을 만날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기초가 분명히 있으면,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터가 사람이나 재정, 조직력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실제로 받으셨던 시험을 떠올려 보십시오. 사탄은 예수님께 돈(떡), 명예(천하만국의 영광), 사랑(하나님에 대한 의심을 유도하며 점프하여 구원을 시험) 등에 대한 유혹을 던졌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말씀으로 이겨내셨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부흥해가는 과정에서도 이 유혹이 그대로 재현됩니다. 교회를 운영하다 보면 재정 문제가 생길 수 있고, 교세가 커지면 명예에 대한 갈망이 생길 수 있으며,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다 보면 사랑이나 인기라는 이름으로 교만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이것이 정말 복음의 길인가?” 하고 돌아볼 줄 아는 공동체가 되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교회를 세우는 핵심 목적은 “하나님께 예배하고,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 받게 하며,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께 응답받는 거룩한 처소가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며(이사야 56장 7절, 마가복음 11장 17절), 구원의 방주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예루살렘 성전이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강도의 소굴”이 되어버렸다는 예화는, 우리의 교회가 어디로든 타락할 수 있음을 경고하는 사건입니다. 돈과 이해관계, 자리다툼과 교권이 교회를 지배하기 시작하면, 그곳에는 예수님의 영광이 사라지고 강도의 소굴이 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교회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될 수 있을까요? 먼저 성도를 비롯하여 교회의 모든 일꾼이 하나님 앞에서 늘 겸손히 자신을 돌아보며, 말씀으로 자신을 태워 없애고(번제의 의미처럼), 성령의 조명하심을 구해야 합니다. 그 과정이 없이 그저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있다, 건물을 봉헌했다”는 형식에 치우치면, 결국 본질에서 멀어지기 쉽습니다.

특히 교회를 건축하는 과정에서도 우리는 늘 이 마음을 간직해야 합니다. “주님, 이 건물이 온전히 주님의 영광과 복음의 확장을 위해 쓰이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교회에 돈과 재능을 드릴 때, 그것이 우리의 허영이나 교만이 아니라 온전히 주님께 드려지는 번제물이 되게 하소서.” 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렇게 기도하며 세워진 교회라면, 비록 건물 자체가 화려하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의 임재와 은혜가 머무는 장소가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모였던 이유를 생각해 봅시다. 성전이란 단순히 제사를 드리는 공간을 넘어,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가 상징되는 곳이었습니다. 그들은 성전이야말로 공동체의 정체성이자 축복의 원천이라 믿었고, 모든 절기와 예배가 그 성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교회를 봉헌한다는 것은 그와 같은 의미를 지니지만, 더 나아가 성령이 내주하시는 시대에는 교회의 물리적 공간뿐 아니라 각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성전’이 된다는 성경적 진리가 있습니다(고린도전서 3장 16절 참조).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를 세우고 봉헌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내 안의 “영적 성전”을 잘 세워가고 있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겉으로 보기에 웅장한 교회를 지었다 할지라도, 그 안에 들어오는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말씀과 기도로 자신을 거룩하게 세워가지 못한다면 그 교회는 어느새 텅 빈 껍데기가 될 수 있습니다. 반면, 겉으로는 작고 초라해 보여도 그 안에 모이는 이들이 서로 사랑하며 헌신하고, 예수님의 터를 견고히 지키고 있다면, 그 교회는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될 것입니다.

트라이 스테이트 지역(뉴욕, 뉴저지, 커네티컷)에 최근 여러 교회를 세우게 된 것도 이런 맥락에서입니다. 뉴욕과 뉴저지, 그리고 커네티컷이라는 대도시와 인구 밀집 지역에 교회를 두어, 여러 민족과 세대가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도하며 또 구원의 복음을 전하게 하려는 의도입니다. 뉴욕 임마누엘, 뉴저지 임마누엘, 커네티컷 임마누엘 등으로 불리는 교회들은 각각 그 지역에 맞게 설립되었지만, 모두 한 가지 동일한 목적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고,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에 이르게 하며,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 교회들은 이전에 감리교나 카톨릭, 침례교가 세웠던 건물을 인수해서 새롭게 봉헌하는 형태로 세워졌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왜 기존 교단에서 사용하던 건물을 사들이는가? 새로운 땅을 구해서 새 건물을 짓는 것은 어떠한가?”라는 의문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질은 그 건물이 속했던 교단이나 외관이 아니라, “지금 이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새로운 공동체가 태어나는가”입니다. 에서가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장자권을 야곱에게 팔았던 성경의 장면을 돌아보면, 귀한 것의 가치를 놓쳐버리는 선택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교회의 가치와 축복을 헛된 이유로 잃어버리지 않도록 더욱 주의해야 합니다.

실제로 장재형목사께서 여러 지역에 교회를 세우고, 봉헌할 때마다 강조하는 것이 “절대 이 교회 건물을 세속적인 이유로는 팔지 말자”는 결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장자의 명분’과 같은 귀한 것이므로, 어떤 이유를 대서라도 개인의 이익이나 순간적 이득 때문에 팔아넘기는 어리석음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신명기 8장 18절)는 말씀을 늘 상기하며, 교회가 번성해 갈수록 오히려 더 겸손하고 더 말씀을 붙드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를 봉헌한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복의 기관”을 세우는 일입니다. 교회가 세워지는 곳마다, 사람들의 영혼이 회복되고, 가정이 회복되고, 더 나아가 그 지역 사회 전체가 하나님께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열매는 적을 수 있어도, 교회 봉헌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점진적으로 확장된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백했듯이, 그는 모든 열정을 다해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우리 역시 각자에게 주어진 재능과 소명을 따라 교회를 세우고 봉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봉헌의 기반은 “예수 그리스도의 터”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 봉헌식이나 행사 때, 가장 먼저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선포하고, 교회의 존재 목적을 명확히 밝히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예수님이 빠진 교회 봉헌은 교회가 아니라 건물 봉헌일 뿐입니다.

교회 봉헌의 기초를 다시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핵심이어야 합니다. 둘째, 교회는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기도와 말씀이 교회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셋째, 이 교회를 통해 궁극적으로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에 이르도록 돕는 것이 교회 설립의 최우선 목적입니다. 넷째, 시험과 유혹이 찾아올 때마다, 교회가 결코 흔들리지 않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장재형목사께서 오래전부터 강조해 온 것 또한 이와 맥을 같이 합니다. “교회 봉헌은 절대 한 번의 이벤트가 아니라, 그 교회가 존재하는 한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복음 위에 스스로를 재점검하며 서는 과정이다. 날마다 말씀으로 기초를 다지지 않으면, 아무리 아름다운 예배당을 지어도 언젠간 흔들려 버린다.” 이와 같은 가르침은 시대를 불문하고 적용되는 진리임을, 우리가 교회를 봉헌하며 거듭 깨닫길 바랍니다.

Ⅱ. 우리의 정체성과 사명: 사람을 낚는 어부의 삶

교회를 세우는 이유, 봉헌의 궁극적 목적은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의 정체성은 무엇이며, 무엇을 위하여 사는가?”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태복음 4장 19절). 이는 모든 제자들에게 주어진 공통된 정체성을 드러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대사명(Great Commission)’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8장 19절 이하,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교회를 세우고, 사람들을 전도하여 세례를 받게 하며, 제자로 양육하는 것은 예수님의 최후 지상 명령입니다. 이렇게 사람을 구원하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일이야말로 교회의 본질적 임무이자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여러 곳에 봉헌하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사람을 낚기 위해서”입니다. 벳사이다란 마을 이름이 ‘어부들의 집’이라는 뜻인데, 예수님의 제자인 베드로와 안드레가 살았던 곳이며,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났던 장소입니다. 이곳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교회는 사람들이 “생명을 낚는” 어부들의 집이어야 합니다. 만약 교회가 이 정체성을 잃고, 그저 안락한 신앙생활만을 추구하거나, 사회적 활동만을 목적으로 삼게 된다면, 본래의 사명을 상실해 버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을 떠올려봅시다. 고린도전서 9장에서 바울은 자신이 여러 모양으로 사역하고,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처럼, 율법 아래에 있는 자에게는 율법 아래 있는 자처럼 했다고 설명했습니다(고린도전서 9장 20~21절).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고자 함이라”고 그는 말했습니다(고린도전서 9장 22절). 이것이 바로“사람을 낚는 어부”의 태도입니다.

장재형목사께서도 한결같이 강조하는 정체성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세우는 사람들이기 이전에, 사람을 주께로 돌이키고 구원하는 일에 헌신하는 사람들이다. 교회를 봉헌하는 목적도 결국 그 영혼들을 품고, 예수님께로 인도하기 위함이다.” 이 말에 따르면, 어떤 사람에게는 교회가 아주 구조적인 프로그램이나 장식, 큰 예배당으로 다가올 수 있지만, 진정한 교회의 영광은“한 영혼이 주께 돌아오는 것”이라는 데 있습니다.

실제로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 26절에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한다”고 선언했습니다. 그에게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습니다. 그 목표는 전도, 곧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려는 열정이었습니다. 이처럼 교회 공동체가 방향 없이 그저 프로그램만 돌리고, 행사만 벌이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잃어버린 영혼들을 주님께 인도할 수 있을까?”를 궁리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우리는 전도를 위하여 다양한 방법을 쓸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고상한 신학적 담론을 나눌 수도 있고, 어떤 때는 소박한 나눔과 섬김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중세나 근대 초기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세계 선교를 적극 시도하지 않았다는 역사를 회고해 보면, 인간은 종종 ‘향방 없는 달음질’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윌리엄 캐리가 등장하기 전까지 본격적인 개신교 세계 선교가 활기를 띠지 않았던 것을 생각해보면, 교회가 얼마든지 자기들끼리만 모여 시간을 허비할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서 제자 삼으라”고 명령하셨고,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는 피할 수 없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며 동시에 의무입니다. 교회를 세우고 봉헌할 때도, 단지 웅장한 예배당 하나 마련했다고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그 교회가 어떻게 영혼들을 낚아서 주님께 인도할 것인지, 제자를 양육하는 역할을 감당하게 될 것인지를 늘 질문해야 합니다.

무화과나무 비유(누가복음 13장 6~9절)를 보면,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를 포도원 주인이 찍어버리려고 할 때 포도원지기가“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라고 간청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열매 없는 시간”에 대한 경각심을 줍니다. 교회가 봉헌되고, 1년, 2년, 3년이 지나도 그곳에 구원받는 영혼이 없고, 사람들을 주님께로 이끄는 열매가 없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예수님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고, 또 그 가치를 잃은 것들에 대해서는 단호한 태도를 보이셨습니다.

사람은 잘 살게 되고, 재정이 풍요로워지면 종종 하나님을 잊기 쉽습니다. 신명기 8장 13~14절, 18절을 보면, “네 소와 양이 번성하고, 은금이 증식되고, 소유가 풍부해진 후에 마음이 교만해져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에 복을 주시지만, 동시에 그 복으로 인해 마음이 교만해져 하나님을 잊지 않도록 경계하십니다.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부흥하고, 사람과 재정이 늘어나고, 사회적 인지도도 생기면, 그만큼 영적으로 깨어 있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는 사람을 낚는 어부다. 우리의 사명은 복음을 전하여 구원의 역사를 이루는 것이다”라는 정체성을 되새겨야 합니다.

“진정한 스타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노래 잘하는 스타, 연기를 잘하는 스타, 사업에서 성공한 스타 등이 넘쳐납니다. 하지만 다니엘서 12장 3절 말씀에 의하면,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고 했습니다. 세상 스타는 시간이 지나면 인기가 식거나 잊혀질 수 있지만, 사람을 주님께로 돌아오게 한 자는 영원토록 빛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봉헌하는 목적도 바로 여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을 구원하고, 그들을 하나님께 기도하게 하고, 주의 말씀을 듣고 성장하도록 돕는 것이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어떤 교회는 장학 사업이나 구제 활동, 사회봉사에 열심을 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까지나 “사람을 구원하려는 목적”과 분리된다면 본말이 전도될 위험이 있습니다. 교회가 어떤 선한 일을 하더라도, 그 궁극은 “복음 전파와 구원 사역”에 있다고 성경은 거듭해서 강조합니다.

우리가 Tri-State 지역에 여러 교회를 두면서, 그 교회들에게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메시지를 분명히 각인시키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비로소 사람들이 돌아오고 회복되며, 구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 교회 안에서는 자연스럽게 기도가 살아나고, 말씀 중심의 거룩한 삶이 이루어집니다.

교회는 단순히 “예배 한 번 드리고 마는 장소”가 아니라,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며, 동시에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훈련하는 영적 전초기지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말씀을 묵상하며, 서로 사랑하고 섬김으로써, 세상 가운데로 파송되어 더 많은 영혼을 낚는 사명을 감당하게 됩니다.

만약 교회가 이 사명을 저버리고, “우리는 그냥 모여서 우리끼리만 잘 지내면 돼”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무화과나무의 비유에서처럼 열매 없는 허탄한 모습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을 향해 나아가도록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1장 5절에서 선지자 예레미야를 부르실 때, “내가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다”고 하셨듯이, 제자들에게도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하신 말씀을 우리에게 주고 계십니다.

이때, 중요한 점은 우리 각자가 부름받은 곳에서 여러 모양으로, 여러 방식으로 전도와 구원의 일을 감당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처럼 지혜롭게 접근하기도 하고, 때로는 우리가 가진 달란트(재능)를 활용해 전도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찬양으로, 어떤 이는 미디어 사역으로, 또 누군가는 가르침과 양육으로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리하여 정말로 영혼들이 주님께 돌이키느냐”입니다. 그 열매를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것이 ‘사람을 낚는 어부’의 본분입니다.

교회를 봉헌한다는 것은, 결국 우리의 정체성과 사명을 재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교회를 통해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도하며,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하는 자들이다.”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받도록 돕는 것이 우리의 존재 이유이며, 교회 자체의 존재 목적입니다. 어떤 이들은 교회를 단순히 ‘종교 시설’ 혹은 ‘사회봉사 기관’ 정도로 생각하기도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고,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의 모임”이며, “만민을 위해 기도하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장재형목사께서 여러 차례 설교와 서신, 강연 등을 통해 일관되게 가르쳐 온 바도 이와 동일합니다. “우리는 그레잇 커미션의 사람들이고, 사람 낚는 어부들이다. 교회를 봉헌하거나 복음을 전하는 모든 행위는 그 한 가지 목적, 즉 ‘영혼을 구원하고 하나님께 돌이키는 것’으로 수렴된다.”라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교회를 곳곳에 세우고, 아름답게 봉헌하며, 그곳에서 열심히 예배하는 이유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그 복음은 죄인을 구원하는 능력이 있고, 하나님과 사람을 연결하는 다리가 됩니다. 우리는 이 복음을 붙들고, “만민을 위한 기도처”라는 교회의 본래 역할을 회복하며, 한 사람이라도 더 주께로 인도하기 위해 힘쓰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이 일이 결코 쉬운 것은 아닙니다. 교회가 커지면 커질수록, 그리고 세워지는 교회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다양한 문제와 시험이 따라올 수밖에 없습니다. 재정적 문제, 조직 운영 문제, 사람 간의 갈등, 사회적 오해 등 여러 도전이 생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늘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서,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살아간다”는 정체성을 붙들 때, 그런 시험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또한 교회가 열매 맺지 못하고 오랜 시간 허송세월할 때, 하나님께서는 어느 순간 그 교회를 책망하시거나 더 나아가 문을 닫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기억해야 합니다.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라는 대목은 마지막 기회와 같습니다. 그러니 교회가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결국 그 땅을 황폐케 하는 존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정말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고자 할 때, 하나님은 기름 부으심과 인도하심을 아끼지 않으십니다. 교회가 적은 인원이든 많은 인원이든, 어린이부터 장년까지 모두가 “어떻게 하면 이웃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한 영혼을 구원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기도한다면, 성령께서 반드시 그 기도에 응답하시고 교회가 성장하게 하십니다.

이러한 믿음의 실제 예는 해외 선교지에서도 발견됩니다. 예를 들어, 잠비아에 파송된 선교사가 그곳 지체들과 함께 흙을 발로 밟아 벽돌을 만들고, 허름한 교회를 지어가며, 주변 영혼들을 섬기는 사진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 교회란 결국 ‘건물’ 이상의 ‘사명 수행의 장’임을 깨닫게 됩니다. 번듯한 건물 없이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기도로 영혼을 살리며, 실제 생명을 돌보는 공동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도전을 줍니다.

“역사를 기록하라”는 권면도 중요합니다. 교회가 세워지는 과정, 사람들이 전도되고 구원받는 스토리, 봉헌 예배의 순간 등을 꼼꼼히 기록해 두는 것은 후대 성도들에게 엄청난 유산이 됩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지나왔어도,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셨는지, 어떤 기도 제목에 어떻게 응답하셨는지 남겨놓으면, 그 기록이 곧 ‘우리 공동체의 정체성’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동행하셨다. 우리는 복음 전파를 위해 달려왔고, 앞으로도 그 길을 갈 것이다.”라는 믿음의 이야기가 되어, 다시 한 번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살아갈 용기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봉헌하는 목적과, 우리의 정체성인 ‘사람을 낚는 어부’의 삶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교회 건물은 그저 수단일 뿐, 목적은“영혼을 구원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주의 나라를 확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떠한 교회를 세우든지, 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굳건히 서서, 복음을 전하고 기도하며, 사람들을 주께로 이끄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교회가 당하는 불시험도 넉넉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불시험은 교회의 재료가 무엇으로 지어졌는지를 폭로합니다. 사랑과 희생, 겸손과 진리로 지어진 공동체라면, 불시험을 거치면서 더 단단해지고 순결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교만과 시기, 분열과 탐욕으로 얼룩져 있다면, 불시험 앞에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고린도전서 3장 15절)는 말은 매우 두려운 경고이자 동시에 희망입니다. 우리는 결국 예수님 안에서 구원을 받았으나, 우리가 교회 안에서 쌓아올린 공적이 전혀 없다면, 불에 타 없어진 것이나 다름없다는 뜻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불에 타지 않고 영원히 남을 수 있는, 금이나 은, 보석으로 비유되는 헌신과 사랑, 그리고 진리 위에 서야 합니다.

교회를 봉헌하는 일은 이 땅에 있는 동안만 유효한 일이지만, 그 교회가 감당한 영혼 구원의 사역, 그곳에서 드려진 기도와 예배,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맺어진 열매는 영원으로 이어지는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교회를 봉헌할 때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서,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살리라”고 다시금 결단해야 하겠습니다.

장재형목사께서 늘 강조하시는 바와 같이, 교회의 번성은 여러 모로 귀한 축복이지만, 동시에 더 많은 책임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리니”(신명기 28장 2절)라는 말씀처럼, 늘 하나님의 음성을 청종하며, 교회가 커질수록 더욱 겸손히 복음에 헌신해야 합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순간, 우리는 무화과나무 비유의 심판을 면치 못할지 모릅니다.

교회 봉헌의 기초와 우리의 정체성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터 위에 교회를 세우는 것은 곧,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살아가겠다는 우리의 결단의 표현입니다. 이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어떠한 어려움과 시험이 와도 교회는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풍성히 맺고 이웃을 주님께로 이끄는 능력의 통로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계 각지에 세워지고 봉헌되는 교회들을 통해 더 많은 이를 구원으로 부르시고, 우리가 기도의 집, 만민이 예배하는 집을 든든히 세워갈 수 있도록 도우실 줄 믿습니다. 우리의 정체성과 사명을 잃지 않고, 늘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로 헌신함으로, 이 땅에서 불타지 않는 공적, 영원히 빛나는 별과 같은 영혼의 열매를 거두는 교회와 성도들이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www.davidja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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