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순절과 성령강림 – 장재형목사

장재형목사와 동료들

1. 오순절의 구약적 배경과 신약에서의 성취

오순절(Pentecost)이라는 명칭은 그리스어 ‘Pentēkostē(Πεντηκοστή)’에서 비롯된 말로, ‘50번째’를 뜻한다. 이 단어의 어원은 헬라어 ‘πέντε(pente)’, 즉 ‘다섯(five)’라는 의미에서 기원한다. 결국 ‘오순’이라고 할 때, 10이 다섯 번 반복되는 50이라는 수가 핵심이 된다. 유대 전통에서는 이 날을 ‘칠칠절’ 또는 ‘맥추절’로 지켰는데, 칠칠절은 유월절(무교절)로부터 일곱 주간이 지난 후에 맞이하는 절기이기 때문에 그렇게 불렸고, 맥추절은 보리추수를 마치고 처음 익은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는 날이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구약성경에서도 이미 이 날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는데, 민수기 28장과 레위기 23장, 그리고 신명기 16장에 맥추절을 지키는 구체적인 지침이 제시되어 있다. 이를테면 “칠칠절 처음 익은 열매를 드리는 날에 너희가 여호와께 새 소제를 드릴 때에도 성회로 모일 것이요 아무 일도 하지 말 것이며(민 28:26)”라는 구절이나 “일곱 안식일 이튿날까지 합하여 오십 일을 계수하여 새 소제를 여호와께 드리되(레 23:16)”라는 말씀,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신 16:10)” 등의 구절이 바로 그것이다.

이처럼 구약성경에서 명백히 언급되는 칠칠절, 맥추절은 보리 추수를 끝낸 뒤에 맨 처음 수확된 열매를 감사의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식이었다. 땅을 주시고 바람과 비를 보내시어 곡식과 과실이 자라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날이며, 자신들이 얻은 소출이 결국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한 것임을 깨닫고 드리는 날이었다. 그뿐 아니라 구약적 전통 안에서 칠칠절은 유대 민족의 정체성과 결부된 매우 중요한 축제였고, 유대의 3대 절기—유월절, 맥추절(또는 칠칠절), 장막절—중 하나였다. 이러한 배경을 기억해야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 임한 성령강림절(오순절)의 의미가 제대로 이해된다.

유대인의 절기인 오순절과 기독교 절기인 성령강림절은 사실상 같은 시기에 해당하지만, 그 의미가 신약을 통해 확장되면서 결정적으로 변모한다. 구약의 칠칠절이 농경 사회에서 첫 수확의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는 날이었다면, 신약시대 오순절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후 지상에서 40일을 보내시고, 승천하신 지 열흘이 지난 때(즉 50일째 되는 날)에 성령이 강림하심으로 말미암아 신약교회가 시작되는 특별한 사건이 일어난다. 이것이 바로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성령강림사건이다.

이 구약에서의 ‘첫 열매를 드리는 절기’라는 의미가 신약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로운 영적 첫 열매’로 해석된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15장 20절에서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라고 선언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심으로 죄의 권세를 깨뜨리셨고, 그리스도의 부활이 바로 ‘첫 열매’라는 것이다. 이 첫 열매를 통해 이후에 수많은 믿는 이들, 즉 교회 공동체가 이어진다는 신학적·구원사적 원리가 드러난다.

바울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단순한 ‘첫 열매’로만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까지 이어지는 모든 구원사적 사건이 구약의 예언과 율법을 완성하는 결정적 사건이라고 해석한다. 율법과 예언은 ‘누가, 어떤 방식으로 인류를 구원할 것인가’를 여러 상징과 예언으로 전했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그 모든 예언의 성취자이며 율법의 마침이시라는 것이다(롬 10:4). 그리고 그 결정적 승리의 표지가 바로 부활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첫 열매가 되셨고, 그 첫 열매를 따라 주를 믿는 모든 이가 차례로 ‘나중 익은 열매’가 된다.

이 부분에서, 사도행전 2장에 등장하는 120명의 제자 무리가 상징성을 갖는다.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뒤 지상에서 40일 동안 제자들을 다시 모으셨다. 제자들은 십자가 처형을 보고 실망하고 흩어졌으나,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이들에게 직접 나타나셔서 십자가의 의미가 승리임을 알게 하셨다. 누가복음 24장에서는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의 이야기가 이 대표적 장면이다. 이들은 예수의 죽음에 절망하여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십자가가 패배가 아니라 율법과 예언의 성취’임을 깨닫고 마음이 뜨거워지게 된다. 이와 비슷하게 제자들 각자가 흩어져 있던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40일 동안 나타나 가르치시고, 그들을 다시 결집시키셨다. 그 40일의 대미에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성령을 기다리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받게 된다(행 1:4~5).

그렇게 10일이 흐른 뒤, 즉 예수 부활 후 50일째 되는 날, 드디어 성령께서 강림하신다. 이것을 신약성경은 매우 극적인 언어로 묘사한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행 2:1)”라고 기록되는 바로 그때, 갑자기 하늘로부터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온 집에 가득하고,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이 제자들 위에 임하며 그들이 성령으로 충만해져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한다. 이는 요엘 선지자가 예언한 말씀이 성취되는 사건이기도 하다. 베드로는 요엘서 2장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주리라”로 선언된다. 예전에는 일부 특별한 사람, 예언자나 특정 지도자에게만 성령이 임했지만, 이제는 나이와 성별, 신분의 차이를 불문하고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 성령을 부어주시는 시대로 전환된 것이다.

특별히 장재형목사는 이 사도행전 2장의 사건이 신약교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점임을 거듭 강조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첫 열매가 되셨고, 그 뒤를 이어 120명의 제자 무리가 성령을 받아 ‘나중 익은 열매’로 익어졌는데, 이들이야말로 초대 교회의 출발점이었기 때문이다. 초대 교회의 태동은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 승천, 그리고 성령 강림이라는 구원사의 중요한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났다. 보리를 거두는 맥추절의 의미가 확장되어, 이제는 영적인 추수, 곧 주를 믿는 자들을 거둬들이는 ‘추수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렇기에 오순절은 곧 ‘추수감사절(Harvest Thanksgiving)’의 의미도 동시에 갖고 있다. 구약에서 맥추절이 보리 추수 후의 감사 절기였다면, 신약교회에서는 성령이 임하심으로 말미암아 ‘영혼의 추수’가 시작되었고, 그것을 기념하는 날이기도 하다. 실제로 오늘날 한국교회나 세계 여러 교회에서는 가을에 추수감사절을 지키지만, 성경적 전통으로 보면 성령강림절(오순절)이야말로 가장 성경에 부합하는 ‘추수감사절’이 된다. 장재형목사는 이 부분을 설교할 때, “우리가 가을에 지키는 추수감사절은 사실 역사적·문화적 배경에 의해 옮겨진 것이며, 성서적 전통에 따르면 오순절이야말로 진정한 추수감사절의 의미를 지닌다”는 점을 환기시키곤 한다.

더 나아가 오순절은 추수의 절기이면서 동시에 파종의 절기이기도 하다. 농경의 원리를 보면, 일정 작물의 수확이 이루어진 뒤, 또 다른 파종이 이루어진다. 이른 비와 늦은 비가 각각 파종과 결실을 돕는 것처럼, 성령 역시 교회의 성장과 추수, 그리고 다시 파종의 역사를 가능케 하신다. 사도행전 2장에서 3천 명이 한번에 회심하는 역사가 일어났는데, 이것은 ‘열매가 즉시 거두어지는’ 은혜의 사건이자, 동시에 교회가 다시금 복음을 뿌리러 나아가는 이정표 같은 사건이다. 이처럼 성령의 역사는 그저 한 번에 머물지 않고, 교회 공동체를 계속해서 추수와 파종의 사이클로 인도한다.

또 다른 구약의 상징인 오병이어의 이야기를 통해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이셨다. 여기서 ‘보리떡 다섯 개’라는 상징도 오순절의 ‘다섯(Pente)’의 의미와 맞닿아 있다고 해석되곤 한다. 오순절이 다섯이 반복되어 50이라는 수가 완성되는 것처럼, 오병이어의 보리떡 다섯은 주님의 은혜로 인해 사람이 먹고 배부르게 되는 신비를 보여준다. 거기에 이어(두 마리 물고기)가 더해져 무수히 많은 이가 배불리 먹는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상징들을 통해 “오순절은 하늘 양식으로 풍성해지는 날이며, 동시에 그 양식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교회의 사명이 시작된 절기”라는 점을 자주 강조한다.

결국 구약의 칠칠절이 ‘이른 비와 늦은 비’로 하여금 보리 추수와 곧 있을 밀의 파종을 준비하는 절기였듯이, 신약의 오순절도 교회가 이미 믿음을 고백한 이들을 돌보며, 동시에 아직 복음을 모르는 이들에게 뿌리기 위한 파종의 때라는 것이다. 그래서 오순절을 단지 한 해의 절기 중 하나로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전 인류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추수의 첫 단추이자, 계속해서 새로운 추수를 향해 씨앗을 뿌리는 파종의 기점으로 삼아야 함을 가르친다. 이때 성령은 그 모든 과정을 이끄시는 분이고, 교회 안팎에서 성도들을 가르치시며, 주님의 뜻을 드러내도록 도우신다.

요약하자면, 첫째로 오순절은 구약의 칠칠절·맥추절에 뿌리를 두고 있고, 보리의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는 풍성한 감사의 절기로 지켜졌다. 신약에 이르러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과 예언을 모두 성취하셨고, 부활을 통해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시며, 이어 승천 후 50일째 되는 날에 성령을 보내심으로써 구약의 절기를 새롭게 재해석·재현하셨다. 둘째로 이것이 하나의 절기 개념을 넘어 교회 시대의 본격적 개막으로 이어지는데, 이는 처음 익은 열매를 통해 또 다른 열매를 거두어들이는 ‘추수감사’이자, 동시에 교회가 또다시 복음의 씨를 뿌리는 ‘파종’의 시점이라는 뜻이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 교회 공동체가 형성되고, 이후 사도행전에서 본격적으로 기록되는 놀라운 선교 역사로 이어진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오순절은 성령의 바람과 불로 인해 성도와 교회가 익어지고, 또다시 세상에 뿌려지도록 이끄는 사건”이라고 강조한다.

이처럼 장재형목사를 비롯한 많은 설교자들은 구약의 의미와 신약의 성취를 통합적으로 가르치면서, 성도들이 오순절을 그저 달력의 한 기념일로 여기지 않도록 권면한다. 오순절이야말로 십자가와 부활로 예비된 구원의 사건이 전 인류로 확장되는 거대한 전환점이자, 초대교회 공동체가 탄생한 역사적 날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성도가 확인해야 할 핵심은 “내가 정말 성령을 힘입어 주님의 구원 사역에 동참하고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 왜냐하면 오순절의 성령 강림은 개인의 감동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거룩한 출발, 그리고 복음 전파의 불꽃이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교회가 오순절을 맞이할 때마다 단순히 과거의 역사만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오늘 우리 각자를 통해 어떤 일을 하고 계시는지, 또 교회가 어떻게 세상에서 추수와 파종의 사명을 수행해야 하는지를 스스로 돌아보게 된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맥락에서 “성령께서 교회에 오신 목적은 분명하다. 곧 우리가 말씀과 진리에 눈뜨고, 죄에서 돌아서며,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도록 권능을 주시기 위함이다. 과연 우리는 그 권능을 받아서 실제로 행하고 있는가?”라고 자주 묻는다. 이 질문은 과거 초대교회만이 아니라, 모든 시대의 교회와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것이다.

2. 성령의 역사와 교회 공동체의 비전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고, 본격적으로 초대교회가 탄생했을 때, 사도행전 2장은 세 가지 주요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첫째, 120명의 제자에게 임한 성령 강림 자체, 둘째, 이에 대한 베드로의 첫 번째 설교, 셋째, 그 후 이어지는 처음 교회의 모습이다. 여기서 베드로의 설교는 사도행전 2장에서 대략 14절부터 36절에 이르는 본문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의 핵심은 오직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가 바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야이시며,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왕이시다”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너희가 그렇게 죽인 그분이 부활하셨다”라는 강력한 선포가 이어지자, 이 말을 들은 유대인들이 큰 충격을 받았다.

이 때 그들은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행 2:37)라고 탄식하면서 회개하고 예수의 이름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는데, 그 수가 한 번에 삼천 명에 이른다고 기록되어 있다(행 2:41). 이것이 바로 초대교회의 시작이자 구체적 형태다. 하루아침에 삼천 명이라는 믿음의 공동체가 생겨난 것이다. 그것은 인간적인 수단이나 지혜로 된 일이 아니라, 전적으로 성령의 능력과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베드로의 설교가 진리를 꿰뚫고 있었고, 부활의 능력이 살아 역사했기에 가능했다. 여기서 우리는 성령 강림이 곧 진리의 깨달음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에 집중해볼 수 있다. 베드로 자신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실한 이해를 얻었고, 그 증언을 통해 믿지 않는 이들도 깊은 깨달음에 이르게 되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기에,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진리대로’ 해석하고 받아들이도록 우리 안에서 역사하신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성령으로 충만해져서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기도하는 공동체가 되었다(행 2:42). 그들은 재산과 소유를 나누어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고, 날마다 성전에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함께 식사하며 교제했다(행 2:44~46). 이러한 모습은 그 자체로 실현된 ‘천국 공동체’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이것이 완벽한 이상향이었던 것은 아니다. 사도행전을 더 읽어 내려가면 교회 안에서 갈등도 생겨나고, 외부로부터 박해도 당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초대교회가 보여준 순수하고 열정적인 믿음과 성령의 능력에 대한 응답은, 이후 모든 교회와 성도가 본받아야 할 본질적 가치로 남았다.

사도행전 이후의 내용도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사도들은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고, 특별히 베드로와 요한 같은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큰 부흥을 경험한다. 그 부흥에 맞서 유대 지도자들은 극심한 박해를 시작했고, 그 결과 교회는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런데 흩어진 교인들 역시 담대히 복음을 전했고, 오히려 그 때문에 유대와 사마리아와 온 땅으로 복음이 확산되는 역설적 결과가 나타났다(행 8장 참조). 이처럼 성령께서 이끄시는 교회는 내부적 박해나 외부적 어려움 속에서도 진리를 놓지 않고 계속 성장해 나갔다. 그리고 사도행전의 중반부에 이르러서는 바울의 이방인 선교가 본격적으로 펼쳐지면서, 복음이 유대 경계를 넘어 이방 땅까지 번져 나간다.

장재형목사는 이 사도행전에 기록된 교회 공동체의 역동적 모습을 토대로, “교회는 본질적으로 선교 공동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 근거는 바로 사도행전 1장 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이다. 성령이 임하는 목적은 교회를 세우고, 그 교회를 통해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며, 더 많은 영혼을 추수하도록 하는 것이다. 결국 오순절 성령 강림은 단순히 ‘신비한 체험’을 주기 위한 사건이 아니라, 복음의 증인으로 살도록 교회 공동체에 힘과 지혜를 공급하는 사건이었다.

특히 사도행전 13~14장에 기록된 바울과 바나바의 1차 선교여행은 성령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교회의 전형적 모습을 보여준다. 안디옥교회는 금식하며 기도하고 있다가, 성령의 음성을 듣고 바울과 바나바를 따로 세워 세계 선교를 위해 파송한다. 이때 바울의 배경이나 실력만 신뢰하거나, 바나바의 인격적 지도력만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성령이 인도하시기에’ 그들을 파송했다. 그리고 그들의 여행 경로를 따라 다양한 곳에서 복음이 전해지고, 헬라인과 유대인들, 그리고 다양한 이방인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한다. 초대교회 공동체가 가진 이 놀라운 영적 역동성은 오늘날 교회가 본받아야 할 원형(model)이다.

이후 사도행전 15장에 등장하는 예루살렘 회의도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할례, 율법 준수 등의 문제로 갈등이 일어났을 때, 교회의 지도자들이 모여 예루살렘에서 회의를 열고, 이방인이라 해도 그리스도를 믿으면 차별 없이 구원에 이른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것은 교회가 처음부터 완벽한 모습을 갖춘 것이 아니라, 다양하고 복잡한 문제에 부딪힐 때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함께 의논’하는 과정을 통해 성장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사도들은 사도행전 15장 28절에서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라고 말한다. 즉, 어떤 결정을 내릴 때, 인간적인 지혜만이 아니라, 성령께서 어떻게 인도하시는지를 분별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초대교회가 가진 영적 열정과 기도, 또 서로 섬기는 사랑과 성령을 의지하는 태도는, 현대 교회가 되살려야 할 본질적 가치이다. 장재형목사는 “교회는 선교의 전초기지이자, 전투를 준비하는 본부와 같다. 우리가 이 땅에서 영적 전투를 하며 복음을 전하려면, 반드시 성령의 능력과 인도하심이 필요하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교회가 오순절을 기념할 때, 이 사건이 단지 2천 년 전 역사적 사실로 그치지 않도록, 끊임없이 기도하며 교회의 사명을 점검하자고 호소한다.

더욱이 사도행전에서 바울은 2차, 3차 선교여행을 통해 소아시아와 유럽 지역 곳곳으로 나아간다. 빌립보, 데살로니가, 고린도, 에베소 등 헬라 문화권의 주요 도시에 복음이 전해지고, 교회가 세워진다. 그리고 사도행전의 말미에는 바울이 로마로 가게 되는 여정이 묘사되는데, 당시 로마가 ‘땅끝’인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에,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이 실현되었다고 보는 상징적 장면이다. 실제로 바울이 로마에 이르러서도 가택연금 상태에서 계속 복음을 전했다는 기록(행 28장)은 교회가 어떤 상황에서도 복음 증거를 멈추지 않는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남긴다.

오늘날도 교회는 이와 동일한 부름을 받고 있다. 시대와 문화가 달라지고, 환경이 바뀌었다 해도,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명령은 변하지 않는다. 성령은 여전히 활동하시며, 교회가 진정으로 순종하고 기도하며 연합할 때, 어디서든 놀라운 추수의 역사를 이루신다. 동시에, 초대교회만큼이나 많은 문제와 갈등, 혼란스러운 이단 사상도 있지만, 그 역시 교회가 ‘성령을 의지하며 함께 모여 분별’하려 할 때 극복해 나갈 수 있다. 교회가 인간적 판단에 매몰되거나 세속화된 권력 구조에 빠지면, 성령의 역사는 가려지고 은혜와 능력이 소멸된다. 그러나 회개하며 성령의 음성을 다시 듣고자 할 때, 교회는 언제나 새롭게 세워질 수 있다.

여기서 장재형목사는 “성령의 역사에 참여한 교회는 결코 머물러 있지 않는다. 늘 뻗어나가고, 선교와 구제와 나눔을 통해 세상 한가운데 복음의 진리를 전한다”고 역설한다. 이는 초대교회가 예루살렘의 지역적 범위를 넘어 이방 세계로 퍼져나갔던 사실에서 분명히 확인된다. 그뿐 아니라 교회 내부에서도 언어와 문화의 벽이 점진적으로 허물어졌고, 서로 다른 배경을 지닌 사람들이 한 몸처럼 연합하여 ‘하나님의 나라’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구축해나갔다. 이런 변화가 가능했던 근본 동력은 역시 성령이셨다. 오순절에 임하셨던 그 성령께서 지금도 교회를 이끌어가시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구원 계획을 깨닫도록 가르치신다.

로마서 8장 26절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성령이 친히 우리 연약함을 도우신다”고 말한다. 이것은 성령이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요 14장 참조)과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내가 가면 보혜사(파라클레토스)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너희와 함께하실 것”(요 16장 요약)이라고 약속하셨다. 그리고 그 약속이 오순절에 성취된 것이다. 성령은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세밀하고 자상한 사랑을 드러내며, 진리를 가르치고, 묶인 영혼을 자유케 하고, 교회를 선교의 길로 이끄신다. 개인적으로 보면, 성령이 우리의 내면을 변화시켜 예수님을 닮아가도록 ‘성화(聖化)’의 길을 걷게 하신다. 교회 차원에서는, 성령이 여러 달란트를 주셔서 다양한 봉사와 섬김이 일어나도록 하신다. 그리고 세상 속에서는, 성령이 능력을 주셔서 복음을 전하고, 곤경에 처한 자들을 돕고,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게 하신다.

오순절 이후, 제자들이 가졌던 확신과 담대함은 전적으로 성령의 능력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만 해도 제자들은 두려워 숨어 있었다. 그러나 성령 강림 후에는 동족 유대인들 앞에서 “당신들이 못 박은 예수가 부활하셨다”고 외치고, 또 재판정에서도 주저함 없이 복음을 증언했다. 초대교회는 그 담대함과 사랑으로 서로를 돌보고, 외부의 핍박과 내적 갈등을 극복해 냈다. 장재형목사는 이 점을 “결국 초대교회의 힘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며, 그 성령은 지금도 동일하신 하나님이시다. 우리의 상황이 어떠하든, 성령 안에서 말씀을 붙들고 나아가면, 어떤 장애도 복음 전파의 걸림돌이 될 수 없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교회의 사명은 끝까지 가야 한다. 오순절로부터 시작된 성령의 역사는, 사도행전에 기술된 바울의 로마 입성으로 일단락되는 것이 아니라, 이후 이 땅의 모든 교회가 계속해서 이어 나가는 구원사의 과정이다. 사도행전 29장이 따로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사실 교회가 존재하는 곳이라면 지금도 “사도행전 29장”이 쓰이고 있는 셈이라고 여러 설교자들이 강조한다. 즉, 사도들의 시대가 지났어도 교회 시대는 계속되고, 성령의 시대가 계속되며, 복음 증거의 과제는 지금도 유효하다는 것이다. 오순절은 바로 그 이야기를 함께 시작한 기념비적 사건이며, 이 땅의 마지막 그리스도인까지 계속될 과업의 원점이다.

이렇듯 오순절의 의미를 “추수와 파종”이라는 두 가지 관점으로 설명할 수 있다. 먼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첫 열매를 드리셨고, 이어 제자들 120명이 성령으로 익어져 나중 익은 열매가 되었다. 이후 3천 명이 회심했고, 교회가 계속 성장했다는 차원에서 ‘추수의 절기’라는 의미가 분명하게 나타난다. 하지만 그 추수로 끝나지 않고, 다시 복음을 온 세계에 파종하는 ‘선교의 공동체’가 탄생함으로써, 다음 추수를 준비하는 역동성이 이어진다. 그러므로 오순절은 단순히 “많은 이가 모여 한 번에 크게 은혜받는다”는 이벤트가 아니라,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고, 동시에 세상으로 다시 파종될 씨앗이 되는” 교회 본연의 모습을 확립하는 날이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야말로 현대 교회가 잊지 말아야 할 오순절의 핵심이라고 역설한다. 교회가 오순절을 맞이하며 자신이 받은 은혜를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거기에서만 멈추면 안 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 감사와 은혜가 또 다른 이들에게 흘러가도록, 적극적으로 파종에 나서야 한다. 그 파종은 전도와 선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봉사를 통해 세상에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하는 모든 사역을 포함한다.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보리떡 다섯과 물고기 두 마리가 무수히 많은 사람을 배불리 먹인 것처럼, 교회에 부어진 성령의 능력과 은혜도 성도 개개인을 통해 세상으로 계속 흘러나갈 때, 수많은 영혼이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게 된다. 이 선한 순환이 계속 일어나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오순절은 가을 무렵에 지키는 ‘추수감사절’과 결을 달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성경적인 추수감사절의 원형이다. 물론 역사적, 문화적 배경 때문에 지금은 가을에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교회 전통이 널리 자리 잡았지만, 신학적으로나 성경 본문의 흐름에서 보자면 오순절이 곧 감사절이요, 파종절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장재형목사는 “오늘날 한국교회도 점차 오순절의 의미를 깊이 재발견하고, 감사와 선교가 어우러진 진정한 절기로 만들어 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이미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육적인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결국 하나님의 은혜에서 왔음을 고백하고, 그 은혜를 또 다른 이들에게 전하기 위한 결단을 다지는 날이기 때문이다.

결국 교회는 성령을 통해 이 모든 과정을 주도적으로 감당할 수 있다. 성령 없이는 누구도 참된 회개와 사랑, 담대함과 인내를 갖출 수 없고, 교회 공동체 안에 진정한 일치와 섬김도 자리 잡기 어렵다. 하지만 성령이 함께 하시면, 교회는 갈등도 해결하고, 새로운 길을 열며,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려는 열망을 유지하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로 또다시 많은 열매가 맺혀 추수하게 되고, 그 열매가 새로운 파종의 씨앗이 되어 계속 확장된다. 오순절을 통해 시작된 이 역사는 초대교회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도 교회가 지속적으로 이어가야 할 사명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장재형목사는 “우리가 진정 오순절의 정신을 회복한다면, 교회가 행하는 모든 예배와 선교, 교육과 봉사가 성령의 열매를 맺는 풍성한 축제가 될 것”이라고 가르친다. 오순절의 의미는 바로 그런 ‘풍성함’이다. 성령의 열매로 우리가 자라고, 그 열매를 통해 세상이 살아나는 모습, 그리고 그 사역을 위해 계속해서 기도하며 예물을 드리고, 자신을 드리는 헌신이 이루어지는 공동체가 오순절 교회라는 것이다. 초대교회가 그런 모델을 보여주었다면, 지금도 그것을 본받고 실천하는 이들이 ‘현대의 오순절 교회’를 만들어가야 한다.

이처럼 성령강림절(오순절)은 교회의 탄생과 더불어, 복음의 세계적 확산과 공동체적 삶의 원동력이 되었다. 우리가 이를 기념할 때, 과연 초대교회가 보였던 선교 열정과 이웃 사랑, 그리고 서로를 돌보는 공동체성을 재현할 수 있을지 질문해볼 필요가 있다. 그 출발점은 바로 우리의 마음속에 성령을 영접하는 일이요, 그분께 온전히 순복하는 일이다. 오순절의 성령 강림은 더 이상 과거 역사가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현재적 사건이며, 교회가 진정 이 부름에 응답한다면 더 큰 역사를 이룰 수 있다. 결국 모든 것은 오순절에 임한 성령의 강한 바람과 불의 열정으로부터 시작한다. 그 뜨거운 은혜가 교회 안에 머물지 않고 세상으로 흘러가는 순간, 우리는 또 한 번의 추수, 또 다른 파종의 기적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오순절을 맞이하여 “열매로 드려지고, 동시에 씨로 파종되라”고 역설한다. 여기서 ‘열매로 드려진다’는 것은 나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 주님이 기뻐하시는 헌신과 감사의 제사를 드린다는 의미이고, ‘씨로 파종된다’는 것은 곧 내 삶이 복음의 씨앗이 되어 세상에 뿌려진다는 말이다. 이는 인간적인 욕심이나 교회의 세속적 성장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내가 선 자리를 예배의 제단이자 선교의 현장으로 삼는다는 결단을 가리킨다. 초대교회는 바로 그 길을 갔고, 지금도 수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그 길을 가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오순절을 통하여 더욱 깊은 감사와 열정을 회복하고, 주님이 맡기신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지상명령을 내 삶의 자리에서 어떻게 구체화할지를 돌아봐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령강림절의 본질이며, 칠칠절과 맥추절의 구약적 뿌리가 신약시대에 열매 맺은 참된 의미라 하겠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장재형목사가 끊임없이 강조하는 ‘교회의 본질 회복’과 ‘성령의 다스림’이, 한국교회와 세계 교회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데 중요한 지향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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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a] La flor de la gracia que brota sobre un cimiento doctrinal firme: la reflexión evangélica del pastor David Jang(Olivet University)

En una madrugada cubierta de niebla, lo que más necesita un caminante que ha perdido el rumbo no es un poste indicador llamativo, sino un suelo sólido que sostenga sus pasos y una dirección absoluta e inmutable como la estrella polar. El paisaje espiritual al que se enfrentan los cristianos de hoy no es muy distinto. En una época en la que desbordan la información y los contenidos de fe tan estimulantes como fugaces, a menudo quedamos desconcertados ante la pregunta fundamental: “¿Dónde tocan tierra las raíces del evangelio que creo?”.

En medio de esta confusión, el pastor David Jang nos invita de nuevo a un “suelo de lo esencial” que, aunque parezca árido, es fértil. Su mirada teológica atraviesa siempre la superficie de los fenómenos y llega al núcleo: la gracia total de Dios. En particular, la Carta a los Gálatas, a la que él presta especial atención, es el registro de una lucha santa para proteger la pureza del evangelio, donde no hay espacio para el mérito humano ni para el compromiso.

Una exégesis afilada del evangelio forjada en el silencio de Arabia

Históricamente, los grandes hallazgos han sido concebidos, por lo general, en tiempos de profunda soledad y silencio. El episodio del apóstol Pablo —quien, tras su conversión en el camino a Damasco, no fue de inmediato a buscar a los apóstoles de Jerusalén, sino que se retiró al desierto de Arabia y pasó allí tres años— es uno de los pasajes más misteriosos y, a la vez, más decisivos de la historia cristiana. El pastor David Jang llama a ese período “la cuna de la teología paulina”. Bajo el sol abrasador y en la quietud barrida por el viento de arena, Pablo habría luchado con intensidad para comprender cómo se cruzaban y se consumaban la Ley que había abrazado como si fuera su vida, y el evangelio de Cristo que había venido a buscarlo.

Ese “tiempo en Arabia” también nos es apremiante hoy. Cuando el pastor David Jang explica el estudio de la Palabra con el término “exégesis”, recurre a la imagen de un cuchillo destinado a sacrificar un buey: una herramienta que entra con precisión. Se trata de un trabajo intelectual arduo y, al mismo tiempo, un acto de adoración que disecciona con agudeza el texto bíblico para revelar la fuente de vida que contiene. Cuando la predicación supera el nivel de contar historias emotivas y avanza hacia una perspectiva teológica que atraviesa la gramática y la historia de la Escritura, entonces la vida del creyente se edifica sobre una roca que no se tambalea.

El misterio del “pan invisible” que susurra El Ángelus de Millet

Viene a la memoria la obra maestra El Ángelus del pintor francés Jean-François Millet. La escena de una pareja de campesinos que, tras terminar la jornada, inclina la cabeza para orar al compás de la campana que suena a lo lejos, parece ordinaria; sin embargo, en ella fluye un orden espiritual sublime. Aquello por lo que dan gracias rebasa la pequeña cesta de patatas frente a sus ojos y apunta a la gracia del Creador que les concedió la vida.

La teología del “pan invisible” (Invisible bread) que subraya el pastor David Jang toca ese mismo pulso. La esencia de la tradición protestante —y en especial de la teología presbiteriana— da prioridad a la gracia que llega mediante la Palabra proclamada, por encima de ceremonias vistosas o ritos llamativos a la vista. El pastor David Jang insiste con firmeza: el rito puede ser una señal valiosa que apunta a la verdad, pero jamás puede convertirse en la esencia. La gracia no es una exaltación pasajera de la emoción subjetiva; solo conserva una vitalidad duradera cuando echa raíces en la verdad objetiva de la Escritura. Esta enseñanza se convierte en una exhortación poderosa para los jóvenes, que con facilidad pueden quedar en una fe superficial centrada en la experiencia: echar el ancla en la roca profunda de la verdad.

La decisión de Jerusalén: la libertad auténtica que concede una verdad nítida

La pureza del evangelio, a veces, exige debate intenso y decisión. El Concilio de Jerusalén de Hechos 15 fue un parteaguas histórico en el que la iglesia superó una crisis de división y renació como iglesia universal. La determinación de no imponer a los gentiles el yugo de la Ley fue, en esencia, la proclamación del corazón del evangelio: “solo por la fe” (Sola Fide).

A través de esa escena, el pastor David Jang subraya que la doctrina no es, en absoluto, un muro que fractura la comunidad; por el contrario, es el único criterio que posibilita la unidad verdadera. Un compromiso ambiguo puede dar una paz momentánea, pero solo un evangelio nítido libera de verdad. La advertencia de Gálatas, repetida en la predicación y el ministerio del pastor David Jang, es una seria alarma apostólica dirigida a nosotros, que con frecuencia caemos en un legalismo moderno —una fe teñida de triunfalismo y de “autoayuda” espiritual—. Cuanto más clara es la verdad, con mayor amplitud podemos abrazar; y solo sobre ese fundamento firme podemos cumplir plenamente nuestra vocación como “pescadores de hombres”.

El discipulado de Cristo que se demuestra en el terreno de lo cotidiano

El final de toda reflexión teológica debe converger siempre en el escenario llamado “vida”. El propósito de levantar con solidez los cinco pilares de la fe —desde Romanos hasta Hebreos— es, en última instancia, decidir cómo viviremos dentro de ese edificio. El pastor David Jang enseña que el evangelio debe crear un nuevo orden en el aula y en el trabajo, y también en los hábitos personales más íntimos.

El verdadero testigo del evangelio no se queda en la retórica de las palabras. Cuando, siguiendo el ritmo espiritual que va de la resurrección a Pentecostés, entrenamos la vida diaria y la llenamos de un amor disciplinado, entonces nos convertimos, por fin, en cartas de Cristo que calientan y transforman el mundo. Si el mensaje del pastor David Jang resuena hoy en los campus y en las comunidades de fe, es porque no queda encerrado en doctrinas abstractas, sino que apunta a un discipulado práctico que vive y se mueve bajo la iluminación del Espíritu Santo.

¿Qué evangelio estamos abrazando ahora mismo? ¿Está nuestra fe sobre la arena del reconocimiento humano, o sobre la roca del llamado de Cristo? Volver una vez más al lugar profundo de la meditación bíblica y decidir amar con mayor pureza el evangelio de la gracia: ese será, probablemente, el camino más glorioso que el cristiano de esta era está llamado a recorr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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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コラム】揺るぎない教理の土台に咲く恵みの花:張ダビデ牧師の福音省察(Olivet University)

霧深い夜明け、道に迷った旅人にとって最も切実なのは、華やかな道標ではなく、足元を支える堅固な大地と、北極星のように変わらない絶対的な方角です。現代のキリスト者が直面する霊的風景も、これと大きく変わりません。無数の情報と刺激的な信仰コンテンツがあふれる時代の中で、私たちはむしろ「私が信じる福音の根はどこに触れているのか」という根源的な問いの前で、戸惑うことがあります。

この混沌の時代に、張ダビデ牧師は私たちを改めて、荒涼としていながらも豊かな「本質の土壌」へと招きます。彼の神学的まなざしは常に現象の表層を突き破り、神の全的な恵みという核心に到達しています。とりわけ彼が注目するガラテヤ書は、人間の功績や妥協が入り込む余地のない福音の純粋性を守るための、聖なる闘いの記録です。

アラビアの沈が生み出した福音のい注解

歴史的に、偉大な洞察はたいてい深い孤独と沈黙の時間の中で孕まれてきました。使徒パウロがダマスコ途上で回心した直後、ただちにエルサレムの使徒たちのもとへ行かず、アラビアの砂漠に退いて三年間を過ごした出来事は、キリスト教史の中でも最も神秘的で、かつ重要な場面の一つです。張ダビデ牧師はこの時間を「パウロ神学の揺籃(ようらん)」と呼びます。灼熱の太陽と静寂の砂嵐の中で、パウロは、自分が生涯命のように握りしめてきた律法と、自分を訪ねて来られたキリストの福音がどのように交差し、完成されるのかを、激しく思索したに違いありません。

この「アラビアの時間」は、今日の私たちにも切実です。張ダビデ牧師は御言葉の研究を「注解(註解)」という語で説明する際、牛を屠(ほふ)る刀のイメージを借ります。これは聖書本文を鋭く解剖し、その中に秘められた命の源を露わにする、骨の折れる知的労苦であると同時に、礼拝の行為でもあります。説教が単に感動的な物語を語る段階を超え、聖書の文法と歴史を貫く神学的洞察へと進むとき、初めて聖徒の人生は揺るがない岩盤の上に建てられます。

ミレの『晩鐘』が語る、見えないパンの神秘

フランスの画家ジャン=フランソワ・ミレーの名作『晩鐘』を思い起こします。一日の仕事を終えた農夫の夫婦が、遠くから聞こえる鐘の音に合わせて頭を垂れ祈る場面は、一見きわめて平凡に見えます。しかしその内には、崇高な霊的秩序が流れています。彼らが感謝する対象は、目の前にある小さなジャガイモの籠を超えて、その命を許された創造主の恵みです。

張ダビデ牧師が強調する「見えないパン(Invisible bread)」の神学は、この絵の情感と響き合っています。プロテスタントの伝統、特に長老派神学の核心は、目に見える華やかな儀礼や可視的な式次第よりも、宣べ伝えられる御言葉を通して臨む恵みに優先順位を置くことにあります。張ダビデ牧師は、儀式が真理を指し示す尊い標識であることを認めつつも、それ自体が本質になり得ないことを断固として説きます。恵みは主観的な感情の高揚ではなく、聖書という客観的真理に根を下ろすときにのみ、持続的な生命力を保ちます。こうした教えは、経験中心の浅い信仰に留まりがちな若者たちに、真理という海底の岩盤へ錨(いかり)を下ろせという力強い勧告となります。

エルサレムの決――鮮明な理がもたらすの自由

福音の純粋性は、ときに激しい論争と決断を要求します。使徒言行録15章のエルサレム会議は、教会が分裂の危機を越えて普遍的教会へと生まれ変わった、歴史的分水嶺でした。異邦人に律法のくびきを負わせないとしたこの決定は、「信仰のみによって(Sola Fide)」という福音の精髄を公に宣言した出来事でした。

張ダビデ牧師はこの場面を通して、教理が決して共同体を分裂させる壁ではなく、むしろ真の一致を可能にする唯一の基準であることを強調します。曖昧な妥協は一時の平和を与えるかもしれません。しかし人を自由にするのは、鮮明な福音だけです。張ダビデ牧師の説教と働きの中で繰り返されるガラテヤ書の警告は、今日の現代版律法主義――成功主義や自己啓発型の信仰――に陥った私たちに向けた、厳粛な使徒的警戒です。真理が鮮明であるほど、私たちはより広く抱きしめることができ、その堅固な基礎の上でこそ「人をとる漁師」としての召命を全うすることができます。

日常の現場で証明されるキリストの弟子道

神学的省察の終着点は、常に「生活」という現場へと収斂されなければなりません。ローマ書からヘブライ書に至る信仰の五つの柱を堅く打ち立てる目的は、結局、その建物の中で私たちがどのように生きるのかを決めるためです。張ダビデ牧師は、福音が講義室と職場、そして最も秘められた個人の習慣の中で、新しい秩序を生み出さなければならないと教えます。

真の福音の証人は、言葉の修辞に留まりません。復活からペンテコステへと続く霊的リズムに従って、日々の生活を鍛えられた愛で満たしていくとき、私たちは初めて、世界を温かく変えるキリストの手紙となります。張ダビデ牧師のメッセージが今日、キャンパスと信仰共同体に響きをもつ理由は、それが抽象的教理に閉じこもるのではなく、聖霊の照らしのもとで生きて動く実践的弟子道を志向しているからです。

私たちは今、どの福音を握りしめているのでしょうか。私たちの信仰は、人の承認という砂の上にあるのでしょうか、それともキリストの召しという岩の上にあるのでしょうか。もう一度、聖書黙想の深みへと帰り、恵みの福音をより純粋に愛することを決断すること――それこそが、この時代のキリスト者が歩むべき最も栄光ある道であるはずです。

日本オリベットアッセンブリー教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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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onique] La fleur de la grâce qui s’épanouit sur le socle solide de la doctrine : la réflexion évangélique du pasteur David Jang(Olivet University)

Dans un petit matin noyé de brume, ce dont un voyageur égaré a le plus besoin n’est pas d’un panneau éclatant, mais d’un sol ferme sous ses pas et d’une direction absolue, immuable comme l’étoile polaire. Le paysage spirituel auquel sont confrontés les chrétiens d’aujourd’hui n’est guère différent. À l’ère où foisonnent informations et contenus religieux toujours plus stimulants, nous restons souvent déconcertés devant cette question fondamentale : « Où plongent réellement les racines de l’Évangile que je crois ? »

Dans ce temps de confusion, le pasteur David Jang nous invite de nouveau vers une « terre de l’essentiel » — austère, mais étonnamment féconde. Son regard théologique traverse toujours la surface des phénomènes pour atteindre le cœur : la grâce entièrement souveraine de Dieu. Et l’Épître aux Galates, qu’il met particulièrement en lumière, est le récit d’un combat sacré visant à protéger la pureté de l’Évangile, sans la moindre place pour le mérite humain ou le compromis.

Une exégèse incisive façonnée par le silence de l’Arabie

Historiquement, les grandes intuitions sont souvent nées dans la profondeur de la solitude et du silence. L’épisode où l’apôtre Paul, juste après sa conversion sur le chemin de Damas, ne se rend pas immédiatement auprès des apôtres de Jérusalem, mais se retire dans le désert d’Arabie pour y passer trois années, demeure l’un des passages les plus mystérieux et les plus décisifs de l’histoire chrétienne. Le pasteur David Jang qualifie ce temps de « matrice de la théologie paulinienne ». Sous un soleil brûlant, au milieu du souffle muet du sable, Paul a dû lutter intensément pour comprendre comment la Loi — à laquelle il s’était attaché comme à la vie — et l’Évangile du Christ venu à sa rencontre se croisent et s’accomplissent.

Ce « temps d’Arabie » nous est, aujourd’hui encore, d’une urgence vitale. Quand le pasteur David Jang décrit l’étude de la Parole par le terme « exégèse », il emprunte l’image du couteau qui abat le bœuf : une lame qui tranche avec précision. Il s’agit d’un labeur intellectuel exigeant — et d’un acte d’adoration — consistant à disséquer finement le texte biblique pour en faire surgir la source de vie qu’il recèle. Lorsque la prédication dépasse le niveau d’un récit simplement émouvant et s’avance vers une intelligence théologique capable de traverser la grammaire et l’histoire des Écritures, la vie du croyant se trouve alors fondée sur un roc inébranlable.

« L’Angélus » de Millet et le mystère du pain invisible

Pensons au chef-d’œuvre du peintre français Jean-François Millet, L’Angélus. La scène d’un couple de paysans, après une journée de travail, inclinant la tête et priant au son des cloches lointaines, paraît d’une simplicité extrême ; pourtant, une noble ordonnance spirituelle y circule. L’objet de leur gratitude dépasse le petit panier de pommes de terre posé devant eux : c’est la grâce du Créateur qui a accordé la vie.

La théologie du « pain invisible » (Invisible bread) que souligne le pasteur David Jang rejoint précisément l’atmosphère de cette toile. Au cœur de la tradition protestante — et, tout particulièrement, de la théologie presbytérienne — se trouve une priorité : non pas des cérémonies fastueuses ou des rites visibles, mais la grâce qui advient par la Parole proclamée. Le pasteur David Jang affirme avec fermeté que les rites sont de précieux panneaux indicateurs qui pointent vers la vérité, mais qu’ils ne peuvent jamais devenir l’essentiel. La grâce n’est pas une simple exaltation subjective des émotions ; elle ne garde sa vitalité que lorsqu’elle s’enracine dans la vérité objective des Écritures. Cet enseignement devient une exhortation puissante pour des jeunes qui risquent de s’en tenir à une foi superficielle, centrée sur l’expérience : « Jetez l’ancre dans le roc profond de la vérité. »

La décision de Jérusalem : la vraie liberté donnée par une vérité nette

La pureté de l’Évangile exige parfois débat, lutte et décision. Le concile de Jérusalem (Actes 15) fut un tournant historique : l’Église y franchit une crise de division pour devenir une Église véritablement universelle. Le choix de ne pas imposer aux non-Juifs le joug de la Loi fut, en substance, la proclamation du cœur de l’Évangile : Sola Fide, « par la foi seule ».

À travers cette scène, le pasteur David Jang insiste : la doctrine n’est jamais un mur qui déchire la communauté, mais l’unique critère qui rend possible une unité authentique. Un compromis flou peut offrir une paix provisoire, mais seule la clarté de l’Évangile libère réellement. L’avertissement de l’Épître aux Galates, que l’on entend de manière répétée dans la prédication et le ministère du pasteur David Jang, est une sévère mise en garde apostolique adressée à notre « légalisme moderne » — une foi réduite au succès et à l’auto-amélioration. Plus la vérité devient nette, plus nous pouvons accueillir largement ; et c’est seulement sur un fondement solide que nous pouvons assumer pleinement notre vocation de « pêcheurs d’hommes ».

Un discipulat du Christ vérifié sur le terrain du quotidien

La réflexion théologique doit, en fin de compte, converger vers le lieu du « vécu ». Le but d’ériger solidement les cinq piliers de la foi — de l’Épître aux Romains jusqu’à l’Épître aux Hébreux — est de déterminer comment nous allons habiter l’édifice ainsi construit. Le pasteur David Jang enseigne que l’Évangile doit instaurer un ordre nouveau dans l’amphithéâtre comme au travail, et jusque dans les habitudes les plus secrètes de l’individu.

Le véritable témoin de l’Évangile ne s’arrête pas à l’éloquence. Lorsque, suivant le rythme spirituel qui va de la résurrection à la Pentecôte, nous remplissons chaque journée d’un amour discipliné, nous devenons enfin la lettre du Christ qui réchauffe le monde. Si le message du pasteur David Jang résonne aujourd’hui sur les campus et au sein des communautés de foi, c’est parce qu’il ne demeure pas enfermé dans une doctrine abstraite : il vise un discipulat pratique, vivant et en mouvement sous l’illumination du Saint-Esprit.

Quel Évangile tenons-nous, en ce moment ? Notre foi repose-t-elle sur le sable de l’approbation humaine, ou sur le roc de l’appel du Christ ? Revenir à la profondeur de la méditation biblique, et décider d’aimer plus purement l’Évangile de la grâce : voilà sans doute le chemin le plus glorieux que le chrétien de notre époque est appelé à empru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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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The Flower of Grace Blooming on a Firm Foundation of Doctrine: Pastor David Jang’s Gospel Reflection(Olivet University)

In a fog-laden dawn, what a lost traveler needs most is not a flashy signpost, but solid ground beneath their feet—and an absolute direction that does not change, like the North Star. The spiritual landscape facing modern Christians is not all that different. In an age overflowing with information and provocative faith content, we often find ourselves unsettled before a fundamental question: “Where do the roots of the gospel I believe actually reach?”

In this era of confusion, Pastor David Jang invites us back to the rugged yet fertile “soil of essentials.” His theological gaze consistently pierces the surface of phenomena and arrives at the core: the wholly sufficient grace of God. In particular, Galatians—so central to his focus—stands as a record of holy struggle to guard the purity of the gospel, a purity into which no human merit or compromise may intrude.

A Sharp Exegesis of the Gospel Forged in Arabia’s Silence

Historically, great insight has often been conceived in deep solitude and silence. One of the most mysterious yet crucial scenes in Christian history is the fact that the Apostle Paul, immediately after his conversion on the road to Damascus, did not go straight to the apostles in Jerusalem, but withdrew into the Arabian desert and spent three years there. Pastor David Jang names this period “the birthplace of Pauline theology.” Under the blazing sun and the desolate winds over the sand, Paul must have wrestled intensely with how the Law—held to him as life itself—and the gospel of Christ who came to him, intersect, are fulfilled, and come to completion.

This “Arabian time” is desperately needed for us today as well. When Pastor David Jang explains the study of Scripture with the word exegesis, he borrows the image of “a knife (刀) that butchers an ox (牛).” It is a strenuous intellectual labor—and an act of worship—that carefully opens up the biblical text to reveal the source of life within it. When preaching rises beyond merely delivering moving stories and advances toward theological insight that runs through the grammar and history of Scripture, only then is the believer’s life built upon bedrock that cannot be shaken.

The Mystery of the Unseen Bread in Millet’s The Angelus

One is reminded of The Angelus, the celebrated masterpiece by French painter Jean-François Millet. The scene of a farmer couple, having finished their day’s labor, bowing their heads in prayer to the distant sound of bells may appear utterly ordinary—yet a sublime spiritual order flows through it. The object of their gratitude reaches beyond the small basket of potatoes before them, to the grace of the Creator who granted that life.

The theology of “Invisible bread,” emphasized by Pastor David Jang, resonates with the spirit of this painting. In the Protestant tradition—especially within Presbyterian theology—the priority lies not in visible splendor or ceremonial pageantry, but in grace that comes through the proclaimed Word. Pastor David Jang affirms that while rites are precious signposts pointing to truth, they can never become the essence itself. Grace is not a mere swelling of subjective emotion; it retains lasting vitality only when rooted in the objective truth of Scripture. This teaching becomes a forceful counsel to young people—who can easily remain in a shallow, experience-centered faith—to drop anchor in the deep-sea bedrock of truth.

Jerusalem’s Decision: True Freedom Given by Clear Truth

The purity of the gospel sometimes demands fierce debate and decisive action. The Jerusalem Council of Acts 15 was a historic watershed in which the church overcame the crisis of division and was reborn as a universal church. The decision not to place the yoke of the Law upon Gentile believers was a proclamation of the gospel’s essence: Sola Fide—by faith alone.

Through this scene, Pastor David Jang insists that doctrine is never a wall that divides the community; rather, it is the only standard that makes true unity possible. Vague compromise may offer a momentary peace, but only a clear gospel sets people free. The warning of Galatians, repeatedly echoed in Pastor David Jang’s preaching and ministry, is a solemn apostolic caution to us today—especially as we fall into modern forms of legalism: success-driven spirituality and self-improvement-as-faith. The clearer the truth becomes, the wider we can embrace others; and only on that firm foundation can we fully carry out our calling as “fishers of men.”

Discipleship Proven in the Field of Everyday Life

The end of theological reflection must always converge on the “field” called life. The purpose of firmly erecting the five pillars of faith—from Romans to Hebrews—is ultimately to determine how we will live inside that house. Pastor David Jang teaches that the gospel must create a new order in the classroom, the workplace, and even in the most hidden habits of private life.

A true witness to the gospel does not remain at the level of rhetorical words. As we follow the spiritual rhythm that moves from the resurrection to Pentecost, and fill each day with trained love, we finally become Christ’s letters that warm and change the world. The reason Pastor David Jang’s message resonates across campuses and faith communities today is that it does not remain confined to abstract doctrine; it aims at practical discipleship—living and moving under the illumination of the Holy Spirit.

What gospel are we holding onto right now? Is our faith built on the sand of human approval, or on the rock of Christ’s calling? Returning again to the deep place of biblical meditation and deciding to love the gospel of grace more purely—this is likely the most glorious path for Christians to walk in this 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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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专栏] 在坚固教义的根基上绽放的恩典之花:张大卫牧师的福音思考(Olivet University)

在雾气弥漫的黎明时分,迷路的旅人最迫切需要的,并非华丽的路标,而是能支撑脚下的坚实地面,以及如北极星般不改的绝对方向。现代基督徒所面对的属灵景观,也与此并无二致。在资讯与刺激性的信仰内容泛滥的时代里,我们常常在“我所信的福音之根究竟触及何处?”这一根本问题面前感到茫然无措。

在这样的混乱时代,张大卫牧师邀请我们再次回到那看似贫瘠却极其肥沃的“本质之土”。他的神学目光总是穿透现象的表层,抵达“上帝完全的恩典”这一核心。尤其是他所关注的《加拉太书》,乃是一份为守护福音纯正而进行的圣洁争战的记录——在其中,人类的功劳与妥协没有插足的余地。

阿拉伯沉默所孕育的福音释经

从历史来看,伟大的洞见往往在深度的孤独与沉默中孕育。使徒保罗在大马士革路上归信之后,并未立刻前往耶路撒冷去见众使徒,反而退到阿拉伯旷野度过三年——这一段经历堪称基督教历史中最神秘却也最关键的篇章之一。张大卫牧师将这段时间称为“保罗神学的摇篮”。在炽热的阳光与寂静的沙风中,保罗必定曾激烈地思索:他毕生如生命般紧握的律法,如何与那主动临到他的基督福音相交汇、并得以成全。

这段“阿拉伯的时间”,对今天的我们同样迫切。张大卫牧师在谈到研读圣经时,常用“释经(注解)”一词来说明,并借用“宰牛之刀”的意象——用锋利的刀刃解剖经文本身,显明其中生命的源头。这既是艰苦的理性劳作,也是敬拜的行动。当讲道不再停留于传递感人的故事,而是进一步贯通圣经的语法与历史,抵达神学洞见之时,信徒的生命才会真正建立在不可动摇的磐石之上。

米勒《》所诉说“看不”之

让我们想起法国画家让-弗朗索瓦·米勒的名作《晚祷》。劳作一天后的农夫夫妇,听见远处钟声便低头祷告——画面看似平凡,却有一种崇高的属灵秩序在其中流动。他们感谢的对象,并非眼前那一篮小小的土豆,而是赐下生命与供应的创造主之恩典。

张大卫牧师所强调的“看不见的饼(Invisible bread)”神学,正与这幅画的情绪相呼应。新教传统,尤其是长老宗神学的核心,在于把优先次序放在“借着所宣讲之道而临到的恩典”之上,而非可见的华丽礼仪或外在仪式。张大卫牧师坚定指出:仪式固然是指向真理的珍贵路标,却不能成为本质本身。恩典并非主观情绪的高涨,而唯有扎根于圣经这一客观真理时,才具备持久的生命力。这样的教导,对容易停留在经验主义浅层信仰的青年而言,是一份强而有力的劝勉:要把锚抛入真理的海底基岩。

耶路撒冷的决断理所下的正自由

福音的纯正,有时需要激烈的争辩与果断的抉择。《使徒行传》第15章的耶路撒冷会议,是教会跨越分裂危机、成为普世教会的历史分水岭。会议决定不把律法的轭加在外邦人身上,这一裁定,正是对“唯独因信(Sola Fide)”这一福音精髓的公开宣告。

张大卫牧师借此强调:教义绝非分裂共同体的墙,反而是促成真正合一的唯一标准。含糊的妥协或许带来短暂和平,但唯有清晰的福音才能使人得自由。张大卫牧师在讲道与事奉中反复强调《加拉太书》的警告,也是对今日“现代版律法主义”——成功主义与自我开发式信仰——所发出的严肃使徒性警戒。真理越清晰,我们越能宽广地拥抱人;也唯有在坚固根基之上,我们才能完整承担“得人如得鱼”的呼召。

在日常现场验证的基督徒之道

神学思考的终点,必须回到“生活”这一现场。坚固竖立从《罗马书》到《希伯来书》的信仰五大支柱,其目的终究是为了决定:我们将在这座建筑之中如何生活。张大卫牧师教导:福音必须在课堂、职场,以及最隐秘的个人习惯之中,建立起新的秩序。

真正的福音见证人,不会停留在语言的修辞上。随着从复活到五旬节的属灵节律,在每日生活里以受训的爱去充满每一天,我们才会成为温暖改变世界的“基督的书信”。张大卫牧师的信息之所以在当代校园与信仰共同体中引发回响,正因为它并不囚禁于抽象教义,而是在圣灵光照之下指向活泼运行的实践门徒训练。

我们此刻究竟抓住的是怎样的福音?我们的信仰,是建立在人们认可的沙土之上,还是建立在基督呼召的磐石之上?再次回到圣经默想的深处,立志更纯净地爱慕恩典的福音——这或许正是这个时代基督徒应当行走的最荣耀之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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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굳건한 교리의 토대 위에 피어나는 은혜의 꽃: 장재형 목사의 복음 사유(Olivet University)

안개 자욱한 새벽, 길을 잃은 나그네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화려한 이정표가 아니라 발밑을 지탱해 주는 단단한 지면과 북극성처럼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방향입니다. 현대 기독교인들이 마주한 영적 풍경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수많은 정보와 자극적인 신앙 콘텐츠가 범람하는 시대 속에서, 우리는 정작 ‘내가 믿는 복음의 뿌리는 어디에 닿아 있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 앞에 당혹해하곤 합니다.

이러한 혼돈의 시대에 장재형 목사는 우리를 다시금 척박하지만 비옥한 ‘본질의 토양’으로 초대합니다. 그의 신학적 시선은 언제나 현상의 표피를 뚫고 들어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라는 핵심에 닿아 있습니다. 특히 그가 주목하는 갈라디아서는 인간의 공로나 타협이 끼어들 틈이 없는 복음의 순수성을 수호하기 위한 거룩한 투쟁의 기록입니다.

아라비아의 침묵이 빚어낸 복음의 날카로운 주해

역사적으로 위대한 통찰은 대개 깊은 고독과 침묵의 시간 속에서 잉태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한 직후 곧바로 예루살렘의 사도들을 찾아가지 않고 아라비아 사막으로 물러나 3년을 보냈던 사건은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신비롭고도 중요한 대목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시간을 ‘바울 신학의 산실’이라 명명합니다. 뜨거운 태양과 적막한 모래바람 속에서 바울은 자신이 평생 생명처럼 붙들었던 율법과, 자신을 찾아오신 그리스도의 복음이 어떻게 교차하고 완성되는지를 치열하게 고뇌했을 것입니다.

이 ‘아라비아의 시간’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절실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말씀 연구를 ‘주해(註解)’라는 단어로 설명할 때, 소(牛)를 잡는 칼(刀)의 이미지를 빌려옵니다. 이는 성경 본문을 예리하게 해부하여 그 안에 담긴 생명의 근원을 드러내는 고된 지적 노고이자 경배의 행위입니다. 설교가 단순히 감동적인 이야기를 전달하는 수준을 넘어, 성경의 문법과 역사를 관통하는 신학적 통찰로 나아갈 때 비로소 성도의 삶은 흔들리지 않는 암반 위에 세워집니다.

밀레의 ‘만종’이 들려주는 보이지 않는 떡의 신비

프랑스의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의 명작 <만종>을 떠올려 봅니다. 일과를 마친 농부 부부가 멀리서 들려오는 종소리에 맞춰 고개를 숙이고 기도하는 장면은 지극히 평범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숭고한 영적 질서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들이 감사하는 대상은 눈앞에 놓인 작은 감자 바구니를 넘어, 그 생명을 허락하신 창조주의 은혜입니다.

장재형 목사가 강조하는 ‘보이지 않는 떡(Invisible bread)’의 신학은 이 그림의 정서와 맞닿아 있습니다. 개신교 전통, 특히 장로교 신학의 핵심은 눈에 보이는 화려한 의전이나 가시적인 예식보다 선포되는 말씀을 통해 임하는 은혜에 우선순위를 둡니다. 장재형 목사는 예식이 진리를 가리키는 소중한 표지판이지만, 그 자체가 본질이 될 수는 없음을 단호히 역설합니다. 은혜는 주관적인 감정의 고양이 아니라, 성경이라는 객관적 진리에 뿌리를 내릴 때만 지속적인 생명력을 가집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경험 중심의 얕은 신앙에 머물기 쉬운 청년들에게 진리의 해저 암반에 닻을 내리라는 강력한 권고가 됩니다.

예루살렘의 결단, 선명한 진리가 선사하는 진정한 자유

복음의 순수성은 때로 치열한 논쟁과 결단을 요구합니다.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 공의회는 교회가 분열의 위기를 넘어 보편적 교회로 거듭난 역사적 분수령이었습니다. 이방인들에게 율법의 멍에를 지우지 않기로 한 이 결정은 ‘오직 믿음으로(Sola Fide)’라는 복음의 정수를 공표한 사건이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장면을 통해 교리가 결코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벽이 아니라, 오히려 진정한 일치를 가능케 하는 유일한 기준임을 역설합니다. 애매한 타협은 잠시의 평화를 줄 수 있지만, 오직 선명한 복음만이 사람을 자유롭게 합니다. 장재형 목사의 설교와 사역에서 반복되는 갈라디아서의 경고는 오늘날 현대판 율법주의—성공주의와 자기계발식 신앙—에 빠진 우리를 향한 엄중한 사도적 경계입니다. 진리를 선명하게 할수록 우리는 더 넓게 품을 수 있으며, 그 견고한 기초 위에서만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의 소명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일상의 현장에서 증명되는 그리스도의 제자도

신학적 사유의 끝은 항상 ‘삶’이라는 현장으로 수렴되어야 합니다. 로마서부터 히브리서에 이르는 신앙의 다섯 기둥을 견고히 세우는 목적은 결국 그 건물 안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함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복음이 강의실과 일터, 그리고 가장 은밀한 개인의 습관 속에서 새 질서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진정한 복음의 증인은 말의 수사에 머물지 않습니다. 부활에서 오순절로 이어지는 영적 리듬을 따라 매일의 삶을 훈련된 사랑으로 채워갈 때, 우리는 비로소 세상을 따뜻하게 바꾸는 그리스도의 편지가 됩니다. 장재형 목사의 메시지가 오늘날 캠퍼스와 신앙 공동체에 울림을 주는 이유는, 그것이 추상적인 교리에 갇혀 있지 않고 성령의 조명 아래 살아 움직이는 실천적 제자도를 지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복음을 붙들고 있습니까? 우리의 신앙은 사람의 인정이라는 모래 위에 있습니까, 아니면 그리스도의 부르심이라는 반석 위에 있습니까? 다시금 성경 묵상의 깊은 자리로 돌아가, 은혜의 복음을 더 순수하게 사랑하기로 결단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이 걸어가야 할 가장 영광스러운 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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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의 화폭에 담긴 복음과 야베스의 역전승: 장재형 목사(Olivet University)의 강해를 중심으로

예술가 렘브란트가 생의 끝자락에서 완성한 불후의 명작 **『탕자의 귀향』**을 가만히 응시해 보십시오. 화면 속 아들의 모습은 처참함 그 자체입니다. 다 해진 옷가지와 벗겨진 신발, 그리고 고난의 세월을 대변하듯 빠져버린 머리카락은 그가 겪어온 삶의 무게를 여과 없이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 비극적인 풍경을 완성하는 것은 아들의 어깨 위에 살포시 내려앉은 아버지의 거칠고도 따스한 두 손입니다. 그 손이 닿는 순간, 아들의 누더기는 수치가 아닌 용서와 회복의 상징으로 탈바꿈합니다.

이 감동적인 장면은 구약 성경 역대상 4장에 기록된 **야베스(Jabez)**의 인생 궤적과 놀랍도록 닮아 있습니다. ‘고통’이라는 저주 섞인 이름을 숙명처럼 안고 태어난 한 남자가 어떻게 이스라엘 지파 중 가장 ‘존귀한 자’로 우뚝 설 수 있었을까요? **장재형 목사(Olivet University)**는 이 극적인 삶의 반전이 일어날 수 있었던 유일한 동력이 바로 ‘기도’였다는 점을 깊이 있는 신학적 혜안으로 조명합니다.


1. 운명의 굴레를 끊어내는 기도의 힘

성경의 족보는 대개 건조한 이름들의 나열로 이어지지만, 야베스의 대목에 이르면 서술의 호흡이 달라집니다. 그의 이름은 어머니가 산고의 고통 속에서 지은 것으로, 태생부터 절망의 낙인이 찍혀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는 사회적 약자이거나 가난과 슬픔이 대물림되는 환경에 놓여 있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장재형 목사는 그의 설교를 통해 중요한 영적 원리를 제시합니다. 인간을 규정하는 것은 그가 처한 열악한 환경이 아니라, 그가 누구를 향해 무릎을 꿇느냐에 달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야베스는 자신을 옥죄는 운명에 순응하는 대신 하늘의 하나님을 향해 고개를 들었습니다.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으로 시작되는 그의 간구는 단순한 물질적 탐욕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철저한 자기 부인이자, 하나님의 개입 없이는 단 한 순간도 소망이 없다는 전적인 의탁의 고백입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품을 향해 달렸듯, 야베스는 기도를 통해 고통의 외피를 벗고 은혜의 세계로 도약한 것입니다.

2. 거룩한 야망으로 지경을 확장하다

야베스의 기도에서 가장 오해하기 쉬운 대목이 바로 “나의 지역(지경)을 넓혀 달라”는 요청입니다. 이를 단순히 부동산이나 영토의 확장으로 치부해서는 안 됩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기도를 이사야 54장의 “네 장막 터를 넓히라”는 예언적 메시지와 결합하여 해석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경’은 복음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이며,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실현되는 거룩한 통치 영역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종종 소극적인 태도를 겸손이라 착각하며 살아가곤 합니다. 그러나 장재형 목사는 누가복음 11장의 ‘밤중에 찾아온 친구’ 비유를 들어 진정한 기도의 동기를 설명합니다. 우리가 떡을 구하는 이유는 내 배를 채우기 위함이 아니라, 굶주린 채 찾아온 이웃을 대접하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지경을 넓혀달라는 기도는 “하나님, 제가 더 많은 영혼을 품고 섬길 수 있도록, 주의 복음을 더 넓은 세상에 전할 수 있도록 저의 그릇을 키워 주옵소서”라는 이타적인 선언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동기가 담긴 기도는 정체된 신앙의 담벼락을 허물고 하늘 보좌를 움직이는 강력한 동력이 됩니다.

3. 환난의 파도를 잠재우는 하나님의 손길

인생이라는 거친 바다 위에서 환난은 예고 없이 찾아옵니다. 야베스는 이 실존적인 위협을 직시했기에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성도가 이 험난한 세상에서 평안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는 것뿐임을 강조합니다.

인간이 제아무리 견고한 성벽을 쌓을지라도 세월과 고난의 파도 앞에서는 무너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기도로 세워진 영적 성벽은 환난 속에서 더욱 단단해집니다. 기도는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하늘의 풍성한 자원을 이 땅의 삶으로 끌어오는 거룩한 통로입니다. 기도를 멈추는 것은 영적인 호흡을 중단하는 것과 같아서, 결국 영혼의 갈증과 삶의 위축을 가져옵니다. 반면, 야베스처럼 깨어 부르짖는 자에게 삶의 현장은 날마다 기적의 현장이 됩니다.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는 성경의 마침표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약속입니다.


결론: 당신의 기도가 역사를 바꿉니다

장재형 목사가 전달하는 야베스의 기도는 오늘날 영적 무력감에 빠진 그리스도인들에게 던지는 강력한 도전입니다. 우리는 평생 고통의 이름표를 달고 환경 탓만 하며 살 것인지, 아니면 기도로 운명의 흐름을 바꾸어 ‘존귀한 자’의 반열에 설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렘브란트의 화폭 속 아버지가 아들을 어루만지며 모든 수치를 덮어주었듯, 기도는 하나님의 거룩한 손길이 우리 삶에 닿게 하는 가장 확실한 수단입니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의 지경을 넓히고 환난을 극복하는 기도를 시작하십시오. 하나님은 이미 당신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실 모든 준비를 마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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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형목사, 복음에 빚진 자의 넓고 따뜻한 마음

로마서 1장 8–15절을 따라 읽다 보면, 사도 바울의 목소리가 단순한 문자 기록을 넘어 오늘을 향해 살아 움직이는 숨결처럼 다가온다. 장재형(Olivet University 설립)목사가 거듭 강조하듯, 이 본문은 형식적인 인사말이 아니라 복음 앞에 서서 ‘빚진 자’가 된 한 인물이 세계 교회를 향해 털어놓는 내밀한 신앙 고백이다. 로마 교회를 향한 감사와 끊이지 않는 중보, 신령한 은사를 나누고자 하는 갈망, 그리고 헬라인과 야만인을 가리지 않고 자신을 빚진 자로 인식하는 바울의 태도는, 오늘 한국 교회와 성도들의 마음에도 여전히 깊은 울림을 남긴다. 장재형목사의 로마서 강해를 따라 이 대목을 묵상하다 보면, 한 사람의 믿음과 작은 공동체가 어떻게 하나님의 거대한 선교의 흐름과 연결되는지를 점차 또렷이 보게 된다.

바울은 무엇보다 먼저 감사로 말을 연다. 로마 교회는 그가 직접 세운 공동체가 아니었고, 그가 도착하기 전 이미 복음이 전해진 곳이었다. 보통이라면 “이방인의 사도인 내가 먼저 가야 하지 않았나”라는 아쉬움이 생길 법하다. 그러나 바울의 마음은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한다. 그는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알려졌다”고 기뻐하며, 자신보다 앞서 수고한 이들을 진심으로 축복한다. 장재형목사가 지적하듯, 이 장면은 바울의 교리 이전에 그의 그릇을 보여 준다. 자신의 사역과 공로를 앞세우기보다, 이미 일하고 계신 하나님 앞에서 기뻐할 줄 아는 마음, 그것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맡을 수 있는 사람의 자질이다.

복음이 확장되는 방식에 대한 바울의 이해 역시 깊다.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작은 예수 운동은 박해 속에서 흩어진 성도들의 발걸음을 타고 안디옥을 지나 마침내 로마에 이르렀다. 그 과정을 누가 주도했는지, 이름이 무엇이었는지는 대부분 남아 있지 않다. 장재형목사가 말하듯, “로마 교회의 시작을 알 수 없다는 사실 자체가 복음의 신비”다. 이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겨자씨 비유를 떠올리게 한다. 작고 보잘것없는 씨앗이 자라 결국 많은 생명을 품는 나무가 되듯, 복음도 눈에 띄지 않는 순종을 통해 역사를 움직인다. 밀레의 그림 「씨 뿌리는 사람」처럼, 오늘 우리의 작은 고백과 짧은 기도, 소소한 사랑의 실천이 언젠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믿음의 숲을 이루게 된다.

바울의 감사 뒤에는 로마 교회를 향한 끊임없는 중보가 이어진다. 그는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성도들을 위해 “쉬지 않고” 기도한다고 말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구절을 두고 로마서를 “기도로 기록된 편지”라고 설명한다. 실제로 로마서의 문장들은 냉정한 신학 정리라기보다, 기도의 자리에서 길어 올린 고백처럼 느껴진다. 이 보이지 않는 기도의 연결망은 오늘날 전 세계 교회를 떠받치는 영적 구조와도 닮아 있다. 시대는 달라졌지만, 교회를 하나로 잇는 힘은 여전히 서로를 기억하며 드리는 기도다.

바울이 로마로 가고자 했으나 길이 막혔다고 말하는 대목은 우리의 현실과도 맞닿아 있다. 그는 단순한 열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안에서” 길이 열리기를 구한다. 그 과정에서 바울은 예루살렘을 먼저 향한다. 장재형목사가 ‘예루살렘 우선의 정신’이라 부르는 이 태도에는, 자신이 복음을 받은 뿌리에 대한 책임감과 연대 의식이 담겨 있다. 영적인 것을 나눈 예루살렘 교회를 물질로 섬기는 이방 교회들의 모습은, 교회를 하나의 몸으로 이해하는 에큐메니컬한 시각을 드러낸다. 세계 선교라는 큰 원을 그리기 전에, 바울은 중심을 먼저 단단히 세웠다.

바울은 또한 이미 세워진 교회들을 다시 찾아가 믿음을 견고히 하는 일을 중요하게 여겼다. 전도는 시작일 뿐이며, 이후의 돌봄과 양육이 없으면 오히려 혼란이 깊어질 수 있음을 그는 알고 있었다. 예수께서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신 말씀처럼, 숫자를 늘리는 데 그치는 신앙은 결코 복음의 목적이 아니다. 복음은 한 사람의 삶 전체를 새롭게 빚어 가는 긴 여정이다.

바울이 말하는 ‘신령한 은사’ 역시 특별한 비밀 지식이 아니다. 그것은 여러 교회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 실패와 회복, 눈물과 위로의 이야기들이다. 장재형목사는 바울의 삶에 축적된 이런 이야기들이야말로 공동체를 세우는 은사라고 설명한다.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처럼, 한 인간의 깊은 회복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다른 이들을 위로하고 굳건하게 만든다.

바울은 로마 교회를 향해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한다”고 말한다. 그는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위치에 서지 않고, 서로 격려받는 공동체를 그린다.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원형적 교회 구조는 여기서 분명해진다. 교회의 중심에는 그리스도가 계시고, 그 주위를 따라 형제자매들이 동등하게 서서 서로의 믿음을 북돋운다. 중세 성당의 장미창처럼, 중심과 가장자리가 끊임없이 빛을 주고받는 구조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는 고백은 바울 신앙의 핵심이다. 율법적 공로 계산에 익숙했던 바울은 다메섹에서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자신의 존재 전체가 갚을 수 없는 사랑의 빚 위에 서 있음을 깨닫는다. 이 빚은 수치가 아니라 은혜의 증거다. 그래서 그는 누구에게나 복음을 전할 책임을 느낀다. 장재형목사가 반복해서 상기시키듯, 전도는 의무 수행이 아니라 이미 받은 사랑에 대한 자연스러운 응답이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이는 복음을 다시 설명하겠다는 선언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복음을 함께 더 깊이 누리고 나누고 싶다는 초대다. 복음은 한 번 듣고 끝나는 정보가 아니라, 평생 새롭게 열리는 은혜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로마서 1장 8–15절을 묵상하며 우리는 바울의 마음, 이름 없는 성도들의 믿음, 그리고 장재형목사가 오늘의 언어로 풀어 주는 복음의 깊이를 함께 마주하게 된다. 그 끝에서 우리 역시 같은 고백에 이르게 된다.
“나는 빚진 자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대로 복음을 전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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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형목사가 읽는 고린도전서 16장의 연보와 사랑

고린도전서는 주후 53–54년 무렵, 복음서들이 아직 폭넓게 편집·정리되기 전의 초대교회 현장을 생생히 비추는 문서로 평가된다. 이 편지가 특별한 이유는 이른 기록 연대만이 아니라, 교리를 삶으로 번역해 내는 사도 바울의 목회 감각이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기 때문이다. 장재형(장다윗)목사는 고린도전서를 “특정 도시 교회에 보낸 사적인 서신”을 넘어 “모든 시대 모든 교회가 마주할 문제에 대한 공적 지침”으로 읽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분열과 음행, 우상 제물, 은사의 오용, 부활 논쟁까지—고린도의 난제들은 오늘 교회가 실제로 부딪히는 주제들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그는 결론부인 16장에서 교리의 정상부가 어떻게 헌금과 시간, 인사와 계획이라는 가장 현실적인 바닥으로 흘러드는지를 주목한다. 믿음의 진리는 머리에서 멈추지 않고 손과 발, 지갑과 스케줄로 흘러가야 한다는 그의 해석은, 오르토독스(orthodox)가 필연적으로 오르토프락시스(orthopraxy)로 이어지는 성경적 리듬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사도행전이 증언하는 1세기 중반 예루살렘의 대기근은, 교회의 보편적 연대를 시험하는 결정적 사건이었다. 복음의 발원지요 모교회였던 예루살렘이 심각한 곤궁에 처했을 때, 바울은 이방 교회들이 영적인 빚을 물질로 갚아야 한다는 확신을 갖는다.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롬 15:27)는 그의 말처럼, 연보는 시혜가 아니라 은혜에 대한 의무적 응답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을 “이웃 사랑”의 실제적 전환점으로 해석한다. “누가 나의 이웃인가?”라는 물음은 결국 “내가 누구의 이웃이 되어 줄 것인가?”라는 결단으로 바뀌어야 하며, 그 결단은 대개 재정적 책임이라는 문을 통과한다. 강도 만난 자의 비유에서 사마리아인이 보여준 돌봄의 태도처럼, 사랑은 지갑을 여는 능력으로 확인된다. 바울의 연보 프로젝트는 바로 그 사랑을 구조화하는 시도였다. 마게도니아의 가난한 교회들이 먼저 자기 형편을 넘어 희생적으로 참여했고, 바울은 이 모범을 부유한 고린도에 제시했다. 그에게 연보는 “감동이 오면 하는 일회성 헌금”이 아니라, 교회의 유기적 연대를 드러내는 공적 행위였다.

이 배경에서 고린도전서 16장 1절은 연보를 “명령”의 어조로 부른다.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여기서 쓰인 단어는 흔히 ‘로게이아(λογεία)’로 표기되며, ‘자발적 선물(카리스, χάρις)’의 정서가 아니라 ‘수집·모금’이라는 제도적 질서를 뜻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차이를 주목한다. 아름다운 마음만으로는 공동체의 아픔을 건널 수 없다. 공동의 고통을 다루려면 공동의 질서가 필요하며, 그 핵심이 정기적이고 책임 있는 모금 체계다. 바울은 지역별 교회에 동일한 표준을 제시함으로써, 어떤 교회는 열심히 내고 어떤 교회는 느슨해지는 불균형을 미리 차단했다. 연보의 표준화, 곧 교회의 보편 법칙을 세우는 행위였다.

바울은 실행 방식도 구체적이다. “매 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고전 16:2). 이 지침은 두 겹의 의미를 갖는다. 첫째, 초대교회가 유대적 안식일(토요일)이 아니라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주간의 첫날’(일요일)에 모였다는 실천사적 흔적이다(행 20:7의 증언과 함께). 둘째, 연보는 즉흥이 아니라 습관이어야 한다. 수입에 비례해 미리 떼어 놓는 선제적 저축, 방문 때 허둥지둥 모금하는 관행을 미연에 방지하는 절차 설정—이것이 바울의 의도였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에서 신자의 재무 생활과 제자도의 만남을 읽어 낸다. 예배가 주간의 리듬을 만들고, 그 리듬 속에서 수입과 지출, 저축과 나눔의 질서가 복음적으로 재구성된다. 그래서 연보는 ‘감정의 떼기’가 아니라 ‘질서의 떼어 놓음’이다. 하나님 나라의 비전이 우리의 가계부에 칸을 차지하도록 만드는 영적 기술이자 가정 경제의 훈련인 셈이다.

모금의 거버넌스도 놓치지 않는다. “너희가 인정한 사람들로 내가 편지로 예루살렘에 보내어 너희 연보를 전달하게 하라”(16:3). 교인들이 신임하는 대표를 세우고, 사도는 추천장을 제공하며, 목적지까지 안전하고 정확하게 전달되도록 이중 안전망을 깐다. 장재형목사는 오늘의 교회 재정 운영에서도 이 원리를 적극 차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모금과 사용, 보고와 감사, 독립 감사와 공개 보고 등 거버넌스의 기본을 세우는 일은 행정이 아니라 영성의 문제다. 연보는 은밀하지만 재정은 투명해야 한다. 은밀함은 하나님께, 투명함은 이웃에게 돌려야 한다. 바울은 이 균형을 아름답게 구현한다.

이어지는 사역 동선과 인적 네트워크의 언급은 바울 리더십의 결을 보여 준다. 그는 에베소에서 오순절까지 머물며 복음의 “광대하고 공효를 이루는 문”이 열렸으나 “대적하는 자도 많다”(16:9)고 솔직히 말한다. 기회와 저항이 동시에 커지는 사역의 역학을 그는 회피하지 않는다. 이후 마게도니아를 거쳐 고린도에 이르러 겨울을 함께 보내고자 한다는 계획은, 그의 비전이 언제나 사람과 공동체를 향해 굽어 있었다는 증거다. 최종 목적지가 로마라 해도, 눈앞의 아픔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돌릴 줄 아는 사랑의 경제가 그를 움직였다. 이 사랑의 우회가 훗날 고린도에서 로마서를 집필하게 되는 섭리의 통로가 된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에 “하나님 나라의 전략”을 본다. 전략은 목표만이 아니라 경로를 포함한다. ‘더 빨리’가 아니라 ‘더 바르게’가 전략이다. 복음의 길은 늘 가장 가까운 이웃을 경유해 가장 먼 도시로 나아간다.

동역자들에 대한 언급은 건강한 권위의 작동 방식을 드러낸다. 그는 젊고 온유한 디모데가 고린도에서 멸시받지 않도록 교회의 배려를 요청하며, 그가 “나와 같이 주의 일을 하는 자”임을 분명히 한다(16:10–11). 권위의 대리성을 신학적으로 정당화하는 동시에, 공동체가 새 지도자를 환대하도록 조율하는 소통이다. 반면 아볼로에 관해서는 자신이 여러 번 권했지만 “지금은 갈 뜻이 없다”는 그의 판단을 그대로 전한다(16:12). 복음 사역 안에서도 판단의 다양성과 일시적 불일치가 존재함을 인정하는 건강한 여백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을 통해, 교회가 ‘말 잘하는 지도자’의 취향에 휘둘리지 말고, 때로는 불편한 헌신의 요청—예루살렘을 위한 연보 같은—에 신실히 응답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듣기 좋은 설교와 보기 좋은 프로그램이 아니라, 함께 멍에를 지는 실천이 공동체를 성숙하게 만든다.

바울의 짧고 강렬한 명령—“깨어라, 믿음에 굳게 서라, 담대하라, 강건하라.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16:13–14)—는 고린도의 영적 미성숙을 겨냥한 처방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다섯 동사를 오늘의 생활 언어로 번역한다. ‘깨어 있음’은 정보 과잉 시대의 분별이고, ‘믿음에 굳게 섬’은 진리 기준의 정립이며, ‘담대함’과 ‘강건함’은 결단의 용기다. 그러나 이 모두를 감싸는 대원칙은 ‘사랑’이다. 사랑 없는 강건함은 폭력이 되고, 사랑 없는 담대함은 돌진이 된다. 사랑이 목적이고 수단이며 분위기가 될 때, 교회의 질서는 생명력이 된다. 이어 언급되는 스데바나의 집과 브드나도, 아가이고는 그 질서를 가능케 한 숨은 주역들이다(16:15–18). 그들은 바울의 부족함을 채우고 그의 마음을 시원케 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의 집에 모인 가정교회의 문안은, 교회의 성장이 장소의 크기가 아니라 헌신의 밀도가 결정함을 보여 준다. 그리고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마라나타”—우리 주여 오시옵소서—라는 엄숙한 경고와 고백은, 모든 실천의 동기가 궁극적으로 ‘주님 사랑’임을 못 박는다. 장재형목사는 이 결말을 “정체성 확인”으로 읽는다. 우리는 ‘사랑하므로 한다.’ 사랑이 빠지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 모든 해석은 오늘의 재정 실천과 목회 리더십, 교회의 상호 책임에 깊은 함의를 던진다. 첫째, 연보는 신학이다. 단지 예산 항목이 아니라 복음의 구조를 반영하는 행위다. 유대인에게서 신령한 복을 받은 이방인의 채무, 선교로 복을 받은 지역 교회의 책임, 자원이 많은 도시 교회가 역사적 모교회와 사회적 취약 지대를 떠받치는 의무—이런 것들이 연보에 응축되어 있다. 그래서 장재형목사는 ‘개교회주의’를 넘어 ‘그리스도의 몸’ 전체를 바라보는 시야를 강조한다. 둘째, 연보는 규칙이다. “매 주일 첫날”이라는 리듬은 마음의 불타오름이 아니라 삶의 구조를 겨냥한다. 신자는 월급의 일정 비율을 선취해 떼어 놓고, 가정은 자녀와 함께 구제와 선교의 저축 봉투를 만든다.  결과적으로 연보는 ‘의로움의 질서’를 세운다. 셋째, 연보는 공동체다. 대표자 선출과 추천장, 전달과 보고의 절차는 신뢰의 공동체를 만든다. 재정이 투명할수록 사랑은 깊어진다. 투명성은 불신을 막는 비용이 아니라 신뢰를 증식시키는 투자다. 넷째, 연보는 선교다. 예루살렘을 향한 사랑이 로마를 향한 비전과 모순되지 않았듯, 지역의 고통을 돌보는 일은 세계 선교의 발판이 된다. 사랑은 언제나 가장 가까운 이웃을 경유해 가장 먼 도시로 확장된다.

장재형목사는 이 벽을 넘는 길이 “직접성”과 “이야기”에 있다고 말한다. 헌금이 어디에, 누구에게,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투명하게 보여 주고, 그 안에 담긴 복음의 이야기—어떤 지역의 형제들이 어떻게 살아났는지, 어느 사역자가 어떻게 숨을 돌렸는지—를 구체로 들려줄 때, 연보는 숫자가 아니라 얼굴을 갖는다. 얼굴을 가진 연보는 식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바울이 고린도에 보낸 대표들, 추천장, 문안과 이름 호명이라는 인격적 언어로 연보를 직조한 이유다. 그는 숫자를 모은 것이 아니라 사람을 모았다. 그렇게 모인 사람과 사랑이 결국 교회의 재정이 되었다.

결국 고린도전서 16장은 신자의 교본이다. 돈은 언제나 신앙의 후미진 곳에서 우리의 우상을 드러낸다. 그래서 바울은 가장 거룩한 교리(부활) 다음에 가장 일상적인 주제(연보)를 배치했다. 부활 신앙은 돈의 사용을 바꾼다. 죽음을 이긴 생명의 논리가 소비와 저축, 나눔과 투자에 창조적 흔적을 남긴다. 여기에 주간의 리듬(주일 첫날), 대표성의 구조(인정받은 사람들), 문서화와 보고(추천장), 상호 문안과 칭찬(스데바나와 동역자들)이 더해질 때, 교회 재정은 단순한 ‘자금’이 아니라 ‘사건’이 된다. 돈이 복음을 운반하고, 복음이 돈의 의미를 새긴다. 이것이 고린도전서 16장의 신비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주간 단위의 선제적 분리로 삶의 질서를 바꾸고, 지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고난의 교회를 정기적으로 섬기며, 재정 거버넌스를 신학화하고, 이름을 불러 수고를 칭찬하자. 마지막으로 ‘마라나타’—주께서 오신다—는 고백을 가슴에 새기자. 이 고백은 시간을 바꾸고, 돈을 바꾸며, 관계를 바꾼다. 우리가 받았으니 이제 나누고, 사랑받았으니 사랑하며, 부활을 믿으니 연보로 부활을 산다. 그렇게 교회는 여전히, 그리고 다시, 한 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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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steur David Jang – L’appel du pêcheur d’hommes


Ⅰ. Les bases de la consécration de l’Église : le fondement de Jésus-Christ

La raison fondamentale pour laquelle nous consacrons une Église et établissons des lieux de culte ici et là, c’est pour ériger notre foi et notre espérance sur le « fondement solide de Jésus-Christ ». Comme l’apôtre Paul l’explique dans 1 Corinthiens 3:10-11, « Selon la grâce de Dieu qui m’a été donnée, j’ai, comme un sage architecte, posé le fondement, et un autre bâtit dessus. […] Car personne ne peut poser un autre fondement que celui qui a été posé, savoir Jésus-Christ. » Ainsi, tout projet de consécration d’une Église commence en s’ancrant dans l’Évangile de Jésus-Christ. Cet élément ne doit jamais vaciller. Même si l’être humain investit beaucoup d’argent pour ériger un bâtiment grandiose, si l’Évangile de Jésus-Christ en est absent, quel sens cela a-t-il? Peu importe l’ampleur du bâtiment ou l’extension de l’assemblée, si ces fondations reposent sur d’autres valeurs que Jésus-Christ, l’ensemble s’effondrera quand viendront les tempêtes et les épreuves.

La solidité et la pérennité de notre bâtiment ou de notre communauté dépendent de la qualité de ces « fondations ». Après avoir enseigné ce qu’on appelle la « Règle d’or » (Matthieu 7:12), Jésus ajoute une parabole sur l’homme sage qui bâtit sa maison sur le roc et l’homme insensé qui bâtit sa maison sur le sable. Souvent, les gens jugent de la solidité ou de l’allure extérieure d’une maison en disant : « C’est magnifique », « C’est robuste ». Mais ils ne peuvent pas réellement savoir si cette maison est construite sur le roc. Cependant, lorsque des pluies diluviennes tombent, que les torrents débordent et que les vents soufflent avec force, on voit clairement quelle maison est édifiée sur le roc et laquelle est bâtie sur le sable.

De nos jours, la même question se pose. Chaque fois que l’on consacre une Église ou que l’on en fonde une nouvelle ailleurs, il faut se demander avant tout : « Cette Église est-elle vraiment bâtie sur le fondement de Jésus-Christ ? » Est-ce une communauté érigée sur l’argent, la renommée ou le pouvoir ecclésiastique, ou est-ce qu’elle puise ses racines dans l’Évangile de Christ ? Nous devons toujours l’examiner. Durant l’ère de l’Église primitive et à travers la Réforme, l’histoire nous montre que les disputes et les épreuves ont souvent porté sur la question : « Où le véritable Évangile est-il incarné ? » En fin de compte, quand on se penche sur l’Histoire, ce n’est ni la taille de l’institution ni l’envergure du bâtiment, mais bel et bien « la réalité du fondement du Christ » qui a déterminé la survie et le développement d’une communauté.

Le pasteur David Jang l’a souvent souligné : lorsque l’on implante une Église, la valeur essentielle reste « Jésus-Christ seul ». Que ce soit lors d’un culte de consécration, lors de l’inauguration d’une Église dans un autre pays ou lors de la proclamation de la Parole, le même message est martelé. Il nous interpelle ainsi : « Peu importe le nom du bâtiment, du lieu ou de l’organisation. L’essentiel est de savoir si nous sommes réellement établis sur le salut et la Parole de Jésus. » Une Église dépourvue de salut, ou où l’Évangile s’estompe, ne saurait se tenir devant Dieu comme une véritable Église.

Lorsque l’on bâtit quelque chose, quelle est la première étape ? Préparer le terrain, consolider le sol et trouver la roche pour poser la fondation. Certains pensent qu’il faut vite ériger une structure visible, et négligent ainsi les travaux de fondation. Pourtant, dans la pratique, la mise en place des fondations peut représenter la moitié, voire plus, de la durée totale d’un chantier, tant c’est une phase cruciale. Même si elle ne se voit pas, si cette fondation est solidement établie, le bâtiment pourra résister à l’épreuve du temps et des intempéries.

Il en va de même pour la consécration de l’Église : avant de se préoccuper de l’apparence ou de la décoration du sanctuaire, il faut placer Jésus comme la pierre angulaire et s’ancrer dans Sa Parole. Nous pourrions orner l’Église ou employer de beaux discours, mais si nous nous coupons de Jésus, le bâtiment et la communauté perdront rapidement leur éclat et leur vitalité.

Dans 1 Corinthiens 3:12 et les versets suivants, Paul mentionne plusieurs matériaux utilisés pour bâtir l’Église. « Or, si quelqu’un bâtit sur ce fondement avec de l’or, de l’argent, des pierres précieuses, du bois, du foin, du chaume, l’œuvre de chacun sera manifestée… » Lors de la construction de l’Église, nous utilisons des « matériaux » variés. Ceux-ci peuvent être de l’or, de l’argent, des pierres précieuses, coûteux et de grande valeur, ou bien du bois, du foin, du chaume, plus accessibles mais périssables au feu. Le choix des matériaux dépend de notre consécration, de notre foi et de nos motivations.

Le point essentiel de Paul est clair : tous ceux qui œuvrent à l’édification de l’Église doivent prendre garde. « De quels matériaux suis-je en train de bâtir cette Église ? » Si je la construis avec mon orgueil, mes désirs égoïstes ou mon ambition de grandeur, tout finira par brûler un jour. Mais si c’est avec humilité, obéissance, sacrifice et amour, alors, tel l’or ou l’argent, ces matériaux seront purifiés et brilleront avec encore plus d’éclat.

Quand survient l’épreuve du feu, il sera révélé si l’œuvre de chacun brûle ou s’illumine davantage. L’Église subit des épreuves dans ce monde. Elles peuvent concerner l’argent, les affections, la réputation, ou diverses tentations et souffrances. Les croyants eux aussi traversent des difficultés similaires. Mais si l’Église est fondée solidement sur Jésus-Christ, elle ne tombera pas. Notre fondation ne repose pas sur des hommes, ni sur l’argent, ni sur notre structure, mais sur l’Évangile de Jésus, le Fils de Dieu.

Rappelons-nous les tentations que Jésus Lui-même a subies. Satan Lui a proposé de la nourriture (le pain), la gloire (les royaumes de la terre) et l’amour, sous forme de défi envers Dieu (se jeter du haut du temple). Jésus a vaincu ces tentations par la Parole de Dieu. Aujourd’hui encore, lorsqu’une Église grandit, elle peut être confrontée à des tentations analogues : problèmes financiers, convoitise de renommée, orgueil dû à une popularité grandissante, etc. Mais la communauté qui se demande sans cesse : « Que ferait Jésus ? » « Est-ce la voie de l’Évangile ? » restera ferme.

Le principal objectif de l’implantation d’une Église est de « rendre un culte à Dieu, permettre à davantage d’âmes d’être sauvées, prier et recevoir Sa réponse dans un lieu saint ». L’Église est censée être une maison de prière pour toutes les nations (Ésaïe 56:7, Marc 11:17) et une « arche de salut ». L’anecdote de la transformation du temple de Jérusalem en un « repaire de voleurs » sous l’égide des chefs religieux à l’époque de Jésus illustre le risque de déviation de l’Église. Dès lors que l’argent, les intérêts personnels, les querelles de places et le pouvoir ecclésiastique prennent le dessus, la gloire du Christ disparaît et l’Église court le danger de devenir un repaire de voleurs.

Comment alors faire pour que l’Église soit réellement une « maison de prière pour tous les peuples » ? Avant tout, chacun, des fidèles aux responsables, doit constamment se présenter devant Dieu avec humilité, s’examiner, laisser la Parole de Dieu le purifier (à l’image de l’holocauste) et invoquer l’éclairage du Saint-Esprit. Sans ce processus, si l’on se contente d’un simple « nous célébrons le culte, nous avons consacré le bâtiment », on s’éloigne facilement de l’essentiel.

Cela vaut également pour la construction d’une Église. Nous devons sans cesse garder ce cœur : « Seigneur, nous voulons que ce bâtiment soit entièrement consacré à Ta gloire et à l’expansion de Ton Évangile. Lorsque nous T’offrons notre argent et nos talents pour Ton Église, fais qu’ils ne soient pas guidés par notre vanité ou notre orgueil, mais qu’ils soient un sacrifice d’holocauste pour Ta seule gloire. » Une Église élevée dans cet esprit portera la présence et la grâce de Dieu, même si l’édifice n’a rien de somptueux.

Songeons au fait que le peuple d’Israël se rassemblait autour du Temple de Jérusalem. Le temple était non seulement un lieu de sacrifices, mais surtout le symbole de la « sainte présence de Dieu ». Les Israélites voyaient en lui le cœur de leur identité collective et la source de leur bénédiction. Toutes leurs fêtes et leurs cultes s’y déroulaient. De nos jours, la consécration d’une Église a une portée similaire, mais plus encore, puisque dans l’ère du Saint-Esprit, chaque croyant est devenu « le temple » dans lequel Dieu habite (1 Corinthiens 3:16).

Ainsi, s’il est important de bâtir et de consacrer une Église, il ne faut pas négliger de construire en parallèle le « temple spirituel » qui est en nous. Même si l’on érige un bâtiment imposant, si les croyants qui y viennent ne se sanctifient pas par la Parole et la prière, cette Église pourrait vite se transformer en coquille vide. Inversement, une petite Église apparemment modeste, où les fidèles s’aiment, se consacrent et défendent fermement le fondement de Jésus, deviendra la lumière et le sel du monde.

C’est dans cette optique que plusieurs Églises ont récemment vu le jour dans la région de la Tri-State (New York, New Jersey, Connecticut). L’idée est de planter des Églises dans ces grandes villes et zones densément peuplées, afin que des personnes de toutes origines et de toutes générations puissent se réunir pour adorer Dieu, prier et annoncer l’Évangile du salut. Les Églises appelées Emmanuel à New York, dans le New Jersey ou dans le Connecticut ont toutes été créées avec des adaptations selon les spécificités régionales, mais partagent le même but : « Glorifier le nom de Jésus-Christ, conduire plus d’âmes au salut et devenir des maisons de prière pour tous les peuples. »

Ces Églises se sont souvent installées dans des bâtiments autrefois utilisés par des églises méthodistes, catholiques ou baptistes, puis rachetés et consacrés à nouveau. Certains peuvent se demander : « Pourquoi racheter des bâtiments déjà existants ? Ne pourrions-nous pas acquérir de nouveaux terrains et construire des édifices neufs ? » Mais l’essentiel ne réside pas dans l’appartenance antérieure du bâtiment ou dans son apparence, mais bien dans la question : « Est-ce qu’une nouvelle communauté est en train de naître ici, sur le véritable fondement de Jésus-Christ ? » En relisant l’histoire d’Ésaü, qui céda son droit d’aînesse à Jacob pour un plat de lentilles parce qu’il avait faim, nous prenons conscience de l’absurdité de perdre quelque chose de précieux pour un motif futile. De même, nous devons veiller à ne pas brader la valeur et la bénédiction de l’Église pour des considérations insignifiantes.

En vérité, le pasteur David Jang a maintes fois insisté, lorsqu’il fondait de nouvelles Églises et les consacrait, sur la nécessité de « ne jamais vendre ces bâtiments à des fins séculières ». Il estime que l’Église de Dieu est aussi précieuse que « le droit d’aînesse » biblique ; on ne doit donc pas la sacrifier pour un profit personnel ou un avantage momentané, quel qu’il soit. Il nous rappelle sans cesse la parole de Deutéronome 8:18 : « Souviens-toi du Seigneur, ton Dieu », afin que plus l’Église se développe, plus elle demeure humble et attachée à la Parole.

Consacrer une Église, c’est en définitive ériger un « instrument de bénédiction ». Partout où l’Église est implantée, des âmes se relèvent spirituellement, les familles se restaurent, et progressivement, toute la société peut revenir à Dieu. Même si les fruits ne sont pas immédiatement visibles, c’est une vérité inébranlable que la consécration d’une Église contribue à l’expansion du royaume de Dieu. L’apôtre Paul s’y est investi de toute son énergie pour annoncer l’Évangile et bâtir des Églises. Nous aussi, selon les talents et l’appel que Dieu nous donne, nous pouvons participer à l’édification et à la consécration d’Églises.

Cependant, n’oublions jamais que tout cela doit reposer sur « le fondement de Jésus-Christ ». Lors des cultes de consécration ou des événements similaires, on proclame en priorité « l’œuvre salvatrice du Christ » et on rappelle la raison d’être de l’Église : il n’y a pas de consécration d’Église sans Jésus. Ce serait juste la consécration d’un bâtiment.

Pour résumer les bases de la consécration de l’Église :

  1. L’Évangile de Jésus-Christ doit rester au centre.
  2. L’Église doit être une maison de prière pour tous les peuples, ce qui suppose que la prière et la Parole soient au cœur de la communauté.
  3. Le but premier de la fondation d’une Église est d’aider le plus grand nombre à parvenir au salut.
  4. Dans les tentations et les épreuves, l’Église doit tenir ferme sur « le fondement de Jésus-Christ » pour ne jamais vaciller.

Depuis longtemps, le pasteur David Jang insiste sur ce même principe : « La consécration d’une Église n’est pas un simple événement ponctuel. Tant que cette Église existera, elle devra sans cesse s’examiner et se replacer sur l’Évangile du Christ. Sans un retour quotidien à la Parole pour raffermir ses bases, même la plus belle cathédrale finira par vaciller. » Puissions-nous, en consacrant une Église, réaliser combien ce principe demeure valide en tout temps.


Ⅱ. Notre identité et notre mission : vivre en pêcheurs d’hommes

Le but ultime de fonder et de consacrer une Église est de « conduire un maximum d’âmes au salut ». Nous devons donc nous interroger : « Qui sommes-nous ? Quelle est notre identité et pour quel objectif vivons-nous ? » Lorsque Jésus appelle Pierre et André, puis Jacques et Jean, Il leur dit : « Je vous ferai pêcheurs d’hommes » (Matthieu 4:19). Cette parole révèle l’identité commune à tous les disciples. Nous pouvons comprendre le « Grand Mandat » (Great Commission) dans la même veine.

En Matthieu 28:19-20, juste avant de monter au ciel, Jésus donne ses dernières instructions aux disciples : « Allez donc, faites de toutes les nations des disciples […] baptisez-les au nom du Père, du Fils et du Saint-Esprit, et enseignez-leur à observer tout ce que je vous ai prescrit. » L’établissement d’Églises, l’évangélisation, le baptême et la formation de disciples constituent l’ordre final de Jésus sur la terre. Ainsi, sauver des âmes et les tourner vers Dieu est l’essence même de la mission de l’Église et de notre identité.

Notre décision de fonder plusieurs Églises a donc pour but de « pêcher des hommes ». Le nom Bethsaïda signifie « maison de pêcheurs ». C’est là où Pierre et André habitaient, et où a eu lieu le miracle de la multiplication des pains et des poissons. Cette signification – « pêcher des âmes » – illustre ce que doit être l’Église : la demeure de ceux qui pêchent les hommes pour les amener à la vie. Si l’Église perd cette identité, se satisfait d’un confort religieux ou se cantonne à une simple action sociale, elle s’éloigne de sa mission initiale.

Repensons aux paroles de l’apôtre Paul dans 1 Corinthiens 9. Il déclare s’être fait « Juif avec les Juifs, sans loi avec ceux qui sont sans loi », afin d’en « sauver le plus grand nombre » (1 Corinthiens 9:20-22). Voilà l’attitude d’un « pêcheur d’hommes ».
De même, le pasteur David Jang n’a cessé de rappeler notre identité : « Nous sommes là pour ramener les âmes au Seigneur et les sauver. Bâtir une Église ou la consacrer vise ultimement à accueillir et guider ces âmes à Jésus. » Aux yeux de certains, l’Église peut apparaître comme un ensemble de programmes, d’ornements ou un grand bâtiment. Pourtant, la véritable gloire de l’Église réside dans le fait « qu’une âme revienne au Seigneur ».

Dans 1 Corinthiens 9:26, Paul déclare : « Moi donc je cours, non pas comme à l’aventure; je frappe, non pas comme battant l’air. » Il avait un objectif clair : l’évangélisation, le salut de « quelques-uns de plus ». De même, l’Église doit éviter de tourner à vide en multipliant sans but des programmes et des événements. Elle doit rechercher et mettre en œuvre des moyens de « ramener les âmes perdues au Seigneur ». C’est cela notre vocation.

Pour évangéliser, nous pouvons user de stratégies diverses : un discours théologique élaboré, un partage fraternel et simple, ou encore un service concret pour gagner les cœurs. Dans l’Histoire, on constate que l’Église a parfois manqué de zèle missionnaire et préféré se replier sur elle-même. Avant William Carey, les efforts missionnaires protestants étaient très limités. Cela montre que l’Église peut, hélas, « courir sans direction ».

Or, Jésus a commandé : « Allez, faites de toutes les nations des disciples. » Il a aussi promis : « Je ferai de vous des pêcheurs d’hommes. » C’est notre identité inaliénable, notre devoir incontournable. Aussi, lorsqu’on consacre une Église, ne nous contentons pas de dire : « Nous avons construit un beau sanctuaire, tout va bien. » Demandons-nous plutôt : « Comment cette Église va-t-elle vraiment pêcher des âmes pour les conduire à Jésus ? Comment va-t-elle former des disciples ? »

Dans la parabole du figuier stérile (Luc 13:6-9), le propriétaire du vignoble veut abattre l’arbre qui ne donne pas de fruit. Le vigneron insiste : « Laisse-le encore cette année, je creuserai tout autour et j’y mettrai du fumier. Peut-être à l’avenir donnera-t-il du fruit; sinon, tu le couperas. » Cette histoire nous avertit du danger de « demeurer sans fruit ». Une Église nouvellement consacrée qui, après un an, deux ans, trois ans, n’a conduit personne au salut ni gagné une âme pour le Seigneur, que va-t-il lui arriver ? Rappelons-nous que Jésus a maudit le figuier sans fruit. Il a pris des mesures radicales envers ce qui a perdu sa raison d’être.

Quand la vie devient plus aisée, que les finances s’améliorent, l’homme a facilement tendance à oublier Dieu. Dans Deutéronome 8:13-14 et 18, il est écrit : « Lorsque ton gros et ton petit bétail se multiplieront, que ton argent et ton or s’accroîtront, et que tout ce qui est à toi se multipliera, ton cœur s’élèvera et tu oublieras l’Éternel, ton Dieu… Souviens-toi de l’Éternel, ton Dieu. » Dieu nous bénit, mais Il nous met aussi en garde contre l’orgueil qui nous ferait L’oublier. Aujourd’hui, c’est pareil pour l’Église : quand elle grandit, quand les ressources humaines et financières augmentent et qu’elle gagne en notoriété, il devient d’autant plus difficile de garder la vigilance spirituelle. C’est pourquoi nous devons nous rappeler sans cesse : « Nous sommes des pêcheurs d’hommes. Notre mission est de prêcher l’Évangile et d’œuvrer au salut des âmes. »

Posons-nous la question : « Qui est la véritable ‘star’ ? » Le monde est rempli de chanteurs, d’acteurs ou de chefs d’entreprise à succès. Pourtant, d’après Daniel 12:3, « Ceux qui auront enseigné la justice à la multitude brilleront comme des étoiles, à toujours et à perpétuité. » Les vedettes de ce monde peuvent se démoder ou être oubliées, mais celui qui ramène plusieurs âmes sur le droit chemin brillera éternellement.

Et c’est là tout l’enjeu de la consécration d’une Église. Son but est de sauver des âmes, d’amener les gens à prier et à entendre la Parole pour grandir spirituellement. Certains lieux de culte s’engagent dans des actions caritatives ou de l’aide sociale, ce qui est louable, mais si cela n’a pas pour finalité la prédication de l’Évangile et le salut, l’Église oublie sa raison d’être. Tout ce que l’Église accomplit de bon doit être au service de « l’annonce de la Bonne Nouvelle et de l’œuvre de salut ».

Le fait que nous ayons baptisé nos Églises « Emmanuel » dans la région Tri-State (et ailleurs) vise à réaffirmer clairement « Dieu est avec nous ». Quand Dieu est avec nous, alors les âmes se repentent et retrouvent la vie, la prière se ravive, la Parole occupe la place centrale et la sainteté se manifeste.

L’Église n’est pas seulement un lieu pour « un culte hebdomadaire », mais bien une « maison de prière pour tous les peuples », un lieu d’où l’identité chrétienne s’enracine et se fortifie pour la mission. Nous y adorons Dieu, méditons la Parole, nous aimons les uns les autres et nous nous servons mutuellement pour être envoyés dans le monde et « pêcher » plus d’âmes.

Si, au contraire, l’Église néglige cette mission en se disant : « Restons entre nous et profitons-en tranquillement », c’est alors qu’elle ressemble au figuier stérile de la parabole. Dieu nous envoie vers le monde. Comme Il dit au prophète Jérémie, dans Jérémie 1:5 : « Je t’établis prophète pour les nations », et Il commande aux disciples de Matthieu 28 : « De toutes les nations faites des disciples. »

L’essentiel, c’est que chacun, selon l’endroit où il est appelé, selon les moyens et les talents qu’il possède, participe à l’évangélisation. Comme Paul, nous pouvons faire preuve de tact et de flexibilité pour toucher différentes personnes. Que ce soit par la musique, les médias, l’enseignement ou d’autres formes de service, notre unique but reste de « ramener les âmes au Seigneur ». Nous devons tout mettre en œuvre pour ce fruit précieux. Voilà la responsabilité d’un « pêcheur d’hommes ».

Consacrer une Église, c’est donc réaffirmer notre identité et notre mission : « Nous sommes le peuple qui adore Dieu, prie, et guide autrui au salut. » Conduire une âme de plus vers Jésus est notre raison d’être et le but de l’Église. Certains voient l’Église comme un « lieu religieux » ou un « organisme de service social », mais bibliquement, l’Église est « le corps de Christ », « la communauté des disciples qui annoncent l’Évangile » et « la maison de Dieu où tous prient ».

Le pasteur David Jang l’a exprimé à maintes reprises dans ses prédications, ses lettres et ses conférences : « Nous sommes le peuple de la Grande Commission, des pêcheurs d’hommes. Tout acte, qu’il s’agisse de consacrer une Église ou d’évangéliser, doit converger vers ce but : amener des âmes au salut et à Dieu. »

En conclusion, si nous érigeons des Églises en divers endroits et les consacrons, si nous y célébrons de beaux cultes, c’est avant tout pour répandre l’Évangile de Jésus-Christ, qui seul sauve les pécheurs et relie les hommes à Dieu. C’est cet Évangile que nous défendons, en restaurant « la maison de prière pour tous les peuples » et en œuvrant pour conduire ne serait-ce qu’une personne de plus jusqu’au Seigneur.

La tâche n’est pas simple. Plus l’Église grandit, plus nous multiplions les lieux de culte, plus nous ferons face à des défis : problèmes financiers, organisationnels, conflits relationnels, incompréhension de la société, etc. Mais si nous restons fermement ancrés dans « le fondement de Jésus-Christ » et l’identité de « pêcheur d’hommes », nous pourrons traverser ces épreuves sans chanceler.

Lorsque l’Église stagne et demeure sans fruits, Dieu peut à un moment l’interpeller sévèrement et même fermer ses portes. Songeons de nouveau à la parabole du figuier : « Maître, laisse-le encore cette année ; je vais creuser le sol autour de lui et y mettre du fumier… » est un cri de la dernière chance. Si l’Église persiste à ne pas porter de fruit, elle devient inutile et finit par être déracinée.

En revanche, si elle s’engage pleinement dans la « pêche des hommes », Dieu lui accordera Son onction et Sa direction. Que l’Église soit grande ou petite, lorsque enfants, jeunes et adultes se mettent à prier : « Comment évangéliser mon prochain ? Comment sauver une âme de plus ? », le Saint-Esprit répondra à cette prière et fera grandir la communauté.

Beaucoup de preuves existent, notamment dans les champs missionnaires à l’étranger. Par exemple, on peut voir, en Zambie, des missionnaires et des chrétiens locaux fabriquer des briques en terre, construire un humble lieu de culte et prendre soin des âmes environnantes, montrant que l’Église est avant tout un « champ de mission » au service de la Parole et de la prière, bien au-delà d’un bâtiment en dur. Même sans structure imposante, là où la Parole est enseignée et la prière persévérante, les âmes sont vivifiées.

Il est également crucial de « consigner par écrit » l’histoire. Relater comment l’Église a vu le jour, comment les âmes ont été évangélisées et sauvées, comment a eu lieu la consécration, est un précieux héritage pour la génération suivante. Même si l’on est passé par de grandes difficultés, le témoignage de l’intervention de Dieu, des sujets de prière et des réponses reçues devient le socle de notre identité commune. « Dieu a marché avec nous. Nous avons œuvré pour prêcher l’Évangile et nous poursuivrons ce chemin. » Ce récit de foi nous incite à reprendre courage et à demeurer « pêcheurs d’hommes ».

La consécration d’une Église et la vie de « pêcheur d’hommes » sont indissociables. Le bâtiment n’est qu’un moyen ; le vrai but est de « sauver des âmes, glorifier le nom de Dieu et étendre Son royaume ». Dès lors, que nous bâtissions une Église ou que nous y exercions notre ministère, nous devons rester fermement sur le fondement de Jésus-Christ, prêcher l’Évangile, prier et amener des gens au Seigneur.

De cette façon, l’épreuve du feu n’aura aucune prise. L’épreuve du feu révèle la nature des matériaux utilisés pour l’édification. Une communauté façonnée par l’amour, le sacrifice, l’humilité et la vérité en sortira purifiée et plus solide. Mais si elle est marquée par l’orgueil, la jalousie, la division et l’avidité, elle s’écroulera.

« Lui-même sera sauvé, mais comme au travers du feu » (1 Corinthiens 3:15) constitue à la fois un avertissement solennel et un signal d’espérance. Certes, nous pouvons être sauvés en Christ, mais si nos œuvres d’édification dans l’Église ne laissent aucune trace, elles seront consumées par le feu. Pour éviter cela, nous devons bâtir avec des matériaux qui ne brûlent pas, comparables à l’or, à l’argent, à des pierres précieuses : l’amour, la vérité, le don de soi.

Il est vrai que la consécration d’une Église n’a de sens qu’en ce monde, mais les fruits qu’elle porte – les âmes sauvées, les prières et les cultes qui s’y élèvent, l’amour vécu selon l’Évangile – ont une valeur éternelle. Ainsi, à chaque consécration, renouvelons notre engagement : « Nous resterons fermement attachés au fondement de Jésus-Christ et vivrons comme des pêcheurs d’hommes. »

Le pasteur David Jang a souvent rappelé que la prospérité d’une Église est une bénédiction, mais aussi une responsabilité plus grande. « Si tu obéis à la voix de l’Éternel, ton Dieu, toutes ces bénédictions viendront sur toi » (Deutéronome 28:2), dit l’Écriture. Plus l’Église se développe, plus elle doit écouter la voix de Dieu, rester humble et s’attacher à l’Évangile. Le jour où elle oublierait son identité de « pêcheur d’hommes », elle s’exposerait à la punition du figuier stérile.

En définitive, le fondement de la consécration de l’Église et l’appel du pêcheur d’hommes ne font qu’un. Bâtir l’Église sur le fondement de Jésus-Christ, c’est proclamer concrètement : « Nous décidons de vivre en pêcheurs d’hommes. » Tant que nous suivrons cette voie, aucune épreuve ni tentation ne pourra faire tomber l’Église. Au contraire, elle portera un fruit abondant et servira de canal puissant pour conduire son prochain vers le Seigneur.

Nous croyons que Dieu, à travers les Églises consacrées dans la région Tri-State et partout dans le monde, appellera davantage d’âmes au salut et nous aidera à édifier des « maisons de prière pour tous les peuples ». Puissions-nous ne jamais perdre notre identité ni notre mission, mais méditer la Parole jour et nuit, nous consacrer dans la prière, et recueillir le fruit impérissable des âmes sauvées, qui brilleront pour l’éternité comme des étoiles.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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