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목사가 읽는 고린도전서 16장의 연보와 사랑

고린도전서는 주후 53–54년 무렵, 복음서들이 아직 폭넓게 편집·정리되기 전의 초대교회 현장을 생생히 비추는 문서로 평가된다. 이 편지가 특별한 이유는 이른 기록 연대만이 아니라, 교리를 삶으로 번역해 내는 사도 바울의 목회 감각이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기 때문이다. 장재형(장다윗)목사는 고린도전서를 “특정 도시 교회에 보낸 사적인 서신”을 넘어 “모든 시대 모든 교회가 마주할 문제에 대한 공적 지침”으로 읽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분열과 음행, 우상 제물, 은사의 오용, 부활 논쟁까지—고린도의 난제들은 오늘 교회가 실제로 부딪히는 주제들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그는 결론부인 16장에서 교리의 정상부가 어떻게 헌금과 시간, 인사와 계획이라는 가장 현실적인 바닥으로 흘러드는지를 주목한다. 믿음의 진리는 머리에서 멈추지 않고 손과 발, 지갑과 스케줄로 흘러가야 한다는 그의 해석은, 오르토독스(orthodox)가 필연적으로 오르토프락시스(orthopraxy)로 이어지는 성경적 리듬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사도행전이 증언하는 1세기 중반 예루살렘의 대기근은, 교회의 보편적 연대를 시험하는 결정적 사건이었다. 복음의 발원지요 모교회였던 예루살렘이 심각한 곤궁에 처했을 때, 바울은 이방 교회들이 영적인 빚을 물질로 갚아야 한다는 확신을 갖는다.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롬 15:27)는 그의 말처럼, 연보는 시혜가 아니라 은혜에 대한 의무적 응답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을 “이웃 사랑”의 실제적 전환점으로 해석한다. “누가 나의 이웃인가?”라는 물음은 결국 “내가 누구의 이웃이 되어 줄 것인가?”라는 결단으로 바뀌어야 하며, 그 결단은 대개 재정적 책임이라는 문을 통과한다. 강도 만난 자의 비유에서 사마리아인이 보여준 돌봄의 태도처럼, 사랑은 지갑을 여는 능력으로 확인된다. 바울의 연보 프로젝트는 바로 그 사랑을 구조화하는 시도였다. 마게도니아의 가난한 교회들이 먼저 자기 형편을 넘어 희생적으로 참여했고, 바울은 이 모범을 부유한 고린도에 제시했다. 그에게 연보는 “감동이 오면 하는 일회성 헌금”이 아니라, 교회의 유기적 연대를 드러내는 공적 행위였다.

이 배경에서 고린도전서 16장 1절은 연보를 “명령”의 어조로 부른다.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여기서 쓰인 단어는 흔히 ‘로게이아(λογεία)’로 표기되며, ‘자발적 선물(카리스, χάρις)’의 정서가 아니라 ‘수집·모금’이라는 제도적 질서를 뜻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차이를 주목한다. 아름다운 마음만으로는 공동체의 아픔을 건널 수 없다. 공동의 고통을 다루려면 공동의 질서가 필요하며, 그 핵심이 정기적이고 책임 있는 모금 체계다. 바울은 지역별 교회에 동일한 표준을 제시함으로써, 어떤 교회는 열심히 내고 어떤 교회는 느슨해지는 불균형을 미리 차단했다. 연보의 표준화, 곧 교회의 보편 법칙을 세우는 행위였다.

바울은 실행 방식도 구체적이다. “매 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고전 16:2). 이 지침은 두 겹의 의미를 갖는다. 첫째, 초대교회가 유대적 안식일(토요일)이 아니라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주간의 첫날’(일요일)에 모였다는 실천사적 흔적이다(행 20:7의 증언과 함께). 둘째, 연보는 즉흥이 아니라 습관이어야 한다. 수입에 비례해 미리 떼어 놓는 선제적 저축, 방문 때 허둥지둥 모금하는 관행을 미연에 방지하는 절차 설정—이것이 바울의 의도였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에서 신자의 재무 생활과 제자도의 만남을 읽어 낸다. 예배가 주간의 리듬을 만들고, 그 리듬 속에서 수입과 지출, 저축과 나눔의 질서가 복음적으로 재구성된다. 그래서 연보는 ‘감정의 떼기’가 아니라 ‘질서의 떼어 놓음’이다. 하나님 나라의 비전이 우리의 가계부에 칸을 차지하도록 만드는 영적 기술이자 가정 경제의 훈련인 셈이다.

모금의 거버넌스도 놓치지 않는다. “너희가 인정한 사람들로 내가 편지로 예루살렘에 보내어 너희 연보를 전달하게 하라”(16:3). 교인들이 신임하는 대표를 세우고, 사도는 추천장을 제공하며, 목적지까지 안전하고 정확하게 전달되도록 이중 안전망을 깐다. 장재형목사는 오늘의 교회 재정 운영에서도 이 원리를 적극 차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모금과 사용, 보고와 감사, 독립 감사와 공개 보고 등 거버넌스의 기본을 세우는 일은 행정이 아니라 영성의 문제다. 연보는 은밀하지만 재정은 투명해야 한다. 은밀함은 하나님께, 투명함은 이웃에게 돌려야 한다. 바울은 이 균형을 아름답게 구현한다.

이어지는 사역 동선과 인적 네트워크의 언급은 바울 리더십의 결을 보여 준다. 그는 에베소에서 오순절까지 머물며 복음의 “광대하고 공효를 이루는 문”이 열렸으나 “대적하는 자도 많다”(16:9)고 솔직히 말한다. 기회와 저항이 동시에 커지는 사역의 역학을 그는 회피하지 않는다. 이후 마게도니아를 거쳐 고린도에 이르러 겨울을 함께 보내고자 한다는 계획은, 그의 비전이 언제나 사람과 공동체를 향해 굽어 있었다는 증거다. 최종 목적지가 로마라 해도, 눈앞의 아픔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돌릴 줄 아는 사랑의 경제가 그를 움직였다. 이 사랑의 우회가 훗날 고린도에서 로마서를 집필하게 되는 섭리의 통로가 된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에 “하나님 나라의 전략”을 본다. 전략은 목표만이 아니라 경로를 포함한다. ‘더 빨리’가 아니라 ‘더 바르게’가 전략이다. 복음의 길은 늘 가장 가까운 이웃을 경유해 가장 먼 도시로 나아간다.

동역자들에 대한 언급은 건강한 권위의 작동 방식을 드러낸다. 그는 젊고 온유한 디모데가 고린도에서 멸시받지 않도록 교회의 배려를 요청하며, 그가 “나와 같이 주의 일을 하는 자”임을 분명히 한다(16:10–11). 권위의 대리성을 신학적으로 정당화하는 동시에, 공동체가 새 지도자를 환대하도록 조율하는 소통이다. 반면 아볼로에 관해서는 자신이 여러 번 권했지만 “지금은 갈 뜻이 없다”는 그의 판단을 그대로 전한다(16:12). 복음 사역 안에서도 판단의 다양성과 일시적 불일치가 존재함을 인정하는 건강한 여백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을 통해, 교회가 ‘말 잘하는 지도자’의 취향에 휘둘리지 말고, 때로는 불편한 헌신의 요청—예루살렘을 위한 연보 같은—에 신실히 응답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듣기 좋은 설교와 보기 좋은 프로그램이 아니라, 함께 멍에를 지는 실천이 공동체를 성숙하게 만든다.

바울의 짧고 강렬한 명령—“깨어라, 믿음에 굳게 서라, 담대하라, 강건하라.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16:13–14)—는 고린도의 영적 미성숙을 겨냥한 처방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다섯 동사를 오늘의 생활 언어로 번역한다. ‘깨어 있음’은 정보 과잉 시대의 분별이고, ‘믿음에 굳게 섬’은 진리 기준의 정립이며, ‘담대함’과 ‘강건함’은 결단의 용기다. 그러나 이 모두를 감싸는 대원칙은 ‘사랑’이다. 사랑 없는 강건함은 폭력이 되고, 사랑 없는 담대함은 돌진이 된다. 사랑이 목적이고 수단이며 분위기가 될 때, 교회의 질서는 생명력이 된다. 이어 언급되는 스데바나의 집과 브드나도, 아가이고는 그 질서를 가능케 한 숨은 주역들이다(16:15–18). 그들은 바울의 부족함을 채우고 그의 마음을 시원케 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의 집에 모인 가정교회의 문안은, 교회의 성장이 장소의 크기가 아니라 헌신의 밀도가 결정함을 보여 준다. 그리고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마라나타”—우리 주여 오시옵소서—라는 엄숙한 경고와 고백은, 모든 실천의 동기가 궁극적으로 ‘주님 사랑’임을 못 박는다. 장재형목사는 이 결말을 “정체성 확인”으로 읽는다. 우리는 ‘사랑하므로 한다.’ 사랑이 빠지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 모든 해석은 오늘의 재정 실천과 목회 리더십, 교회의 상호 책임에 깊은 함의를 던진다. 첫째, 연보는 신학이다. 단지 예산 항목이 아니라 복음의 구조를 반영하는 행위다. 유대인에게서 신령한 복을 받은 이방인의 채무, 선교로 복을 받은 지역 교회의 책임, 자원이 많은 도시 교회가 역사적 모교회와 사회적 취약 지대를 떠받치는 의무—이런 것들이 연보에 응축되어 있다. 그래서 장재형목사는 ‘개교회주의’를 넘어 ‘그리스도의 몸’ 전체를 바라보는 시야를 강조한다. 둘째, 연보는 규칙이다. “매 주일 첫날”이라는 리듬은 마음의 불타오름이 아니라 삶의 구조를 겨냥한다. 신자는 월급의 일정 비율을 선취해 떼어 놓고, 가정은 자녀와 함께 구제와 선교의 저축 봉투를 만든다.  결과적으로 연보는 ‘의로움의 질서’를 세운다. 셋째, 연보는 공동체다. 대표자 선출과 추천장, 전달과 보고의 절차는 신뢰의 공동체를 만든다. 재정이 투명할수록 사랑은 깊어진다. 투명성은 불신을 막는 비용이 아니라 신뢰를 증식시키는 투자다. 넷째, 연보는 선교다. 예루살렘을 향한 사랑이 로마를 향한 비전과 모순되지 않았듯, 지역의 고통을 돌보는 일은 세계 선교의 발판이 된다. 사랑은 언제나 가장 가까운 이웃을 경유해 가장 먼 도시로 확장된다.

장재형목사는 이 벽을 넘는 길이 “직접성”과 “이야기”에 있다고 말한다. 헌금이 어디에, 누구에게,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투명하게 보여 주고, 그 안에 담긴 복음의 이야기—어떤 지역의 형제들이 어떻게 살아났는지, 어느 사역자가 어떻게 숨을 돌렸는지—를 구체로 들려줄 때, 연보는 숫자가 아니라 얼굴을 갖는다. 얼굴을 가진 연보는 식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바울이 고린도에 보낸 대표들, 추천장, 문안과 이름 호명이라는 인격적 언어로 연보를 직조한 이유다. 그는 숫자를 모은 것이 아니라 사람을 모았다. 그렇게 모인 사람과 사랑이 결국 교회의 재정이 되었다.

결국 고린도전서 16장은 신자의 교본이다. 돈은 언제나 신앙의 후미진 곳에서 우리의 우상을 드러낸다. 그래서 바울은 가장 거룩한 교리(부활) 다음에 가장 일상적인 주제(연보)를 배치했다. 부활 신앙은 돈의 사용을 바꾼다. 죽음을 이긴 생명의 논리가 소비와 저축, 나눔과 투자에 창조적 흔적을 남긴다. 여기에 주간의 리듬(주일 첫날), 대표성의 구조(인정받은 사람들), 문서화와 보고(추천장), 상호 문안과 칭찬(스데바나와 동역자들)이 더해질 때, 교회 재정은 단순한 ‘자금’이 아니라 ‘사건’이 된다. 돈이 복음을 운반하고, 복음이 돈의 의미를 새긴다. 이것이 고린도전서 16장의 신비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주간 단위의 선제적 분리로 삶의 질서를 바꾸고, 지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고난의 교회를 정기적으로 섬기며, 재정 거버넌스를 신학화하고, 이름을 불러 수고를 칭찬하자. 마지막으로 ‘마라나타’—주께서 오신다—는 고백을 가슴에 새기자. 이 고백은 시간을 바꾸고, 돈을 바꾸며, 관계를 바꾼다. 우리가 받았으니 이제 나누고, 사랑받았으니 사랑하며, 부활을 믿으니 연보로 부활을 산다. 그렇게 교회는 여전히, 그리고 다시, 한 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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