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5-6장
갈라디아서 강해를 통해 본 그리스도의 법
09 / 30 / 2026
최근 기독교계에 깊이 있는 신학적 담론을 제시하고 있는 장재형 목사가 사도 바울의 갈라디아서 5장과 6장에 대한 심층 강해를 통해, 현대 교회가 회복해야 할 신앙의 본질을 역설했다. 장 목사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단순한 개인의 윤리적 덕목 목록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아가페’ 사랑이라는 단일한 뿌리에서 파생된 유기적 총체임을 천명했다. 나아가 그는 이러한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이 필연적으로 율법주의적 정죄와 시기심을 극복하고, 범죄한 형제를 온유함으로 회복시키며 서로의 짐을 짊어짐으로써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공동체적 삶으로 이어진다고 강조했다.
장 목사의 이번 강해는 율법의 행위가 아닌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역설한 갈라디아서의 핵심 주제를 현대적 언어와 신학적 통찰로 재해석했다는 점에서 주목받는다. 당시 갈라디아 교회는 바울이 전한 순수한 복음에서 벗어나 할례와 같은 율법의 행위를 구원의 조건으로 삼으려는 ‘다른 복음’의 위협에 직면해 있었다. 장 목사는 바로 이 지점에서, 바울이 제시하는 성령의 열매가 율법의 조문들을 기계적으로 지키려는 시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내면에서부터 솟아나는 생명의 원리임을 명확히 했다.
장 목사는 강해의 서두에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로 나열된 아홉 가지 열매의 첫 단추이자 모든 것의 근원인 ‘사랑’의 본질을 규명하는 데 집중했다. 그는 세상이 노래하는 사랑, 즉 조건적이고 감정적이며 유한한 사랑(에로스, 필리아)과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의 사랑(아가페)을 명확히 구분했다. 장 목사는 “아가페는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없는 대상을 향한 하나님의 자기희생적이며 무조건적인 사랑”이라 정의하며, 그 원형이 로마서 5장 8절에 압축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그는 이 사랑의 본질을 히브리적 사유의 핵심인 ‘안다(yādaʿ, 야다)’는 개념을 통해 더욱 심도 있게 조명했다. 헬라 철학이 지식(그노시스)을 이성적이고 관념적인 앎으로 이해한 반면, 히브리어 ‘야다’는 단순한 정보 습득을 넘어 인격적이며 언약적인 깊은 관계, 즉 경험과 순종이 수반되는 체휼적 앎을 의미한다. 장 목사는 “성경에서 ‘안다’는 것은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삶으로 아는 것”이라며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분의 사랑의 관계 안으로 들어가 그분의 성품을 온전히 체득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요한복음 21장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는 이 원리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예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아가파스 메)”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는 차마 ‘아가페’ 사랑을 고백하지 못하고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필로 세)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답한다. 장 목사는 “이는 자신의 세 번의 부인으로 사랑의 실패를 처절하게 경험한 베드로가, 자신의 사랑을 증명하려 하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주님의 ‘아심’에 모든 것을 의탁하는 겸손의 고백”이라고 해석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인간적 결단이나 의지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나약하고 죄 많은 우리를 먼저 아시고 사랑하신 하나님의 선제적인 은총에 대한 반응이라는 것이다.
이어서 제시되는 ‘화평’은 구약의 ‘샬롬’ 개념에 뿌리를 둔 것으로, 단순한 갈등의 부재가 아닌 온전함, 번영, 그리고 하나님 및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를 의미한다. 장 목사는 바울 서신의 서두에 “은혜와 평강”이 관용구처럼 등장하는 것은 신학적 필연성을 담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인 은혜가 선행될 때 비로소 참된 평강이 결과로 따라온다”며, 이 평강의 핵심을 ‘하나님과의 화목’이라고 설명했다.
성령의 법을 따라 사는 삶은 필연적으로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갈 5:26)는 바울의 권면으로 귀결된다. 장재형 목사는 이 지점에서 시기 질투의 죄가 인류의 원죄와 얼마나 깊이 연관되어 있는지를 창세기 강해를 통해 심도 있게 분석했다. 그는 창세기 3장의 아담의 죄가 ‘수직적 죄’의 원형이라면, 4장에 나타난 가인의 죄는 동생 아벨이 받은 축복을 기뻐하지 못하고 그를 살해한 ‘시기 질투’, 즉 ‘수평적 죄’의 뿌리라고 진단했다.
장 목사는 이 논의를 갈라디아서 6장으로 자연스럽게 연결시키며, 바울이 제시하는 기독교 윤리의 핵심을 ‘관계의 회복’과 ‘상호 책임’으로 요약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 6:1). 율법주의는 죄와 벌의 도식에 따라 범죄한 자를 즉각적으로 정죄하고 찌르지만, 복음이 제시하는 새로운 삶의 방식은 ‘온유한 심령’으로 그를 ‘바로잡는’ 것이다.
장 목사는 요한복음 8장의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를 통해 율법과 복음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율법을 앞세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여인을 돌로 치려 했지만,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으로 그들의 위선적인 의를 해체시키셨다. 주님께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셨을 때, 이는 정죄가 아닌 용서를 통해 새로운 삶의 기회를 부여하는 것이 복음의 방식임을 선포하신 것이다.
이러한 용서의 원리는 마태복음 18장의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에서 더욱 명확해진다. 우리가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을 전액 탕감받았다는 사실,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무한한 용서를 경험했다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용서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마땅한 의무가 된다.
결론적으로, 갈라디아서 6장 2절의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는 명령은 이 모든 논의의 정점이다. 남의 죄를 정죄하는 대신 그 허물을 덮어주고 함께 아파하며 그가 회복되도록 돕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속죄 정신을 본받아 서로의 짐을 지는 삶의 시작이다. 장재형 목사의 갈라디아서 강해는 이처럼 우리를 자기 의와 정죄의 감옥에서 해방시킨다. 그리고 성령 안에서 서로의 짐을 기꺼이 짊어지며, 사랑과 용서의 공동체를 세워나가는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삶으로 우리를 강력하게 초대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