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코 끊어지지 않는 사랑의 사슬: 로마서 8장에 나타난 구원의 절대적 확신 – 장재형 목사(올리벳대학교 설립자)의 강해를 중심으로

🏛️ 사형 집행의 그림자 속에서 발견한 생명의 신비

1849년 12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세묘노프 광장에는 죽음보다 차가운 정적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매서운 칼바람 속에서 청년 작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는 혁명 가담이라는 죄목으로 총살대 앞에 섰습니다. 눈을 가릴 천이 내려오고 방아쇠가 당겨지기 직전의 찰나, 극적인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황제의 특사가 감형 소식을 들고 달려온 것입니다. 사형은 시베리아 유배로 바뀌었고,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그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었습니다.

도스토옙스키는 훗날 그 절체절명의 순간을 회상하며 “삶 자체가 나에게 주어진 거대한 선물임을 깨달았다”고 고백했습니다. 이 강렬한 체험은 그의 위대한 문학적 성취인 『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그는 인간이 맞닥뜨릴 수 있는 가장 처참한 심연과 어둠 속에서도 과연 구원이 가능한지를 집요하게 물었고, 그의 펜 끝은 언제나 하나의 결론을 향했습니다. “사랑이 먼저 존재한다면, 인간은 반드시 구원받는다”는 확신이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로마서 8장 28절에서 39절의 말씀을 해설하며, 도스토옙스키가 사형대 앞에서 마주했던 그 실존적 고백을 복음의 언어로 연결합니다. 고난의 한복판에서, 혹은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결코 끊어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두고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라고 담대히 선포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선언이 단순히 감상적인 위로가 아니라, 우주적인 승리의 함성임을 강조합니다.


🎨 거룩한 모자이크: 고통의 파편을 엮어 만드시는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8$ 로 $8:28$). 장재형 목사는 이 구절을 설명할 때 ‘거룩한 모자이크’라는 비유를 즐겨 사용합니다. 모자이크 조각 하나하나를 가까이서 보면 날카롭고 거칠며, 때로는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빛나는 기쁨의 조각이 있는가 하면, 도저히 쳐다보고 싶지 않은 수치와 말할 수 없는 통증의 조각도 존재합니다. 그러나 거장 되신 하나님의 손길이 이 조각들을 배치하고 멀리서 바라보게 하실 때, 비로소 그것들은 하나의 완벽하고 아름다운 성화를 완성하는 필수적인 요소가 됩니다.

이러한 주권적 섭리의 기초 위에서 바울은 구원의 서정을 다섯 단계로 나열합니다. 그것은 예지(미리 아심), 예정(미리 정하심), 소명(부르심), 칭의(의롭다 하심), 그리고 영화(영화롭게 하심)입니다. 장재형 목사(올리벳대학교 설립)는 이 ‘황금 사슬’이 인간의 공로나 자격과는 단 1%의 상관도 없음을 역설합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랑에서 시작되어 그분의 성실하심으로 완성되는 과정입니다.

그는 특히 예지예정 교리가 차가운 운명론이나 철학적 사변으로 변질되는 것을 경계합니다. 이 가르침의 본질은 논쟁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극심한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을 향한 ‘가장 뜨거운 위로’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 자신이 바로 그 증거였습니다. 교회를 박해하고 신자들을 결박하던 ‘죄인의 괴수’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났을 때, 그는 자신의 자격이 아니라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사랑이 자신을 먼저 정하셨음을 깨달았습니다. 이 흔들리지 않는 뿌리가 있었기에, 바울은 어떤 핍박 속에서도 복음의 길을 끝까지 완주할 수 있었습니다.


⚖️ 하늘 법정의 변호: 정죄의 목소리를 잠재우는 대언자의 간구

로마서 8장 31절에 접어들면 바울의 어조는 마치 폭포수와 같은 웅변으로 변모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장재형 목사는 이 선언을 신자에게 부여된 ‘우주적 안전 보장 증서’라고 풀이합니다. 자신의 가장 소중한 독생자까지 아끼지 않고 내어주신 하나님께서,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혜로 주시지 않겠느냐는 논리입니다. 가장 큰 것을 주신 분이 그보다 작은 것을 아까워하실 리 없다는 이 ‘확실한 논법’은 우리의 모든 불안을 잠재웁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마치 거대한 하늘 법정의 풍경을 연상시킵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누가 정죄하리요.” 세상의 비난이나 사단의 참소, 심지어 우리 내면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자책의 목소리조차도 “의롭다 하신 이가 하나님이시다”라는 대법관의 최종 판결 앞에서는 무력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중보’를 특별히 주목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신자의 안전은 자신의 감정이나 결단력이 얼마나 굳건한가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변호하시는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환난, 곤고, 박해, 기근, 적신, 위험, 칼 — 초대교회 성도들이 직면했던 이 살벌한 목록들은 오늘날 현대인들이 겪는 영적 공허함과 내면의 불안으로 그 형태만 바뀌었을 뿐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시대가 변해도 이 말씀이 가진 ‘대적할 수 없는 은혜’의 효력은 조금도 약해지지 않았음을 선포합니다.


⛓️ 끊을 수 없는 사랑: 나의 붙듦이 아닌 하나님의 붙드심

마침내 로마서 8장 38절과 39절에 이르면, 바울의 언어는 인간의 말을 넘어선 천상의 찬가로 승화됩니다. 사망, 생명, 천사, 권세자, 현재 일, 장래 일, 능력, 높음, 깊음, 그리고 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낼 수 없다는 선언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장엄한 결론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대목에서 신앙의 가장 본질적인 지점을 짚어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이 사랑을 필사적으로 붙잡으라”고 명령하지 않습니다. 대신 “하나님이 결코 우리를 놓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선포할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견인(堅忍)’ 교리가 가진 진정한 심장박동입니다. 구원의 확신은 나의 연약한 의지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나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집요하고도 성실한 사랑에서 비롯됩니다. 내가 흔들릴 때에도, 심지어 내가 그 손을 놓치려 할 때에도 하나님의 손은 우리를 더욱 강하게 쥐고 계십니다.

도스토옙스키는 죽음의 총구 앞에서 삶이 선물임을 깨달았습니다. 바울은 다메섹의 빛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자신보다 먼저 도착해 있었음을 알았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로마서 8장의 강해를 마무리하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동일한 진리를 전합니다. 인생의 어떤 어두운 터널을 지나더라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끊어지지 않습니다. 모든 깊은 성경 묵상의 끝은 결국 이 하나의 고백으로 수렴됩니다. “은혜는 내가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먼저 아셨고, 먼저 정하셨으며,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이 거대한 반석 위에 서는 것, 그것이 복음이 우리에게 요청하는 유일한 응답이며 가장 담대한 신앙의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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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의 화폭에 담긴 복음과 야베스의 역전승: 장재형 목사(Olivet University)의 강해를 중심으로

예술가 렘브란트가 생의 끝자락에서 완성한 불후의 명작 **『탕자의 귀향』**을 가만히 응시해 보십시오. 화면 속 아들의 모습은 처참함 그 자체입니다. 다 해진 옷가지와 벗겨진 신발, 그리고 고난의 세월을 대변하듯 빠져버린 머리카락은 그가 겪어온 삶의 무게를 여과 없이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 비극적인 풍경을 완성하는 것은 아들의 어깨 위에 살포시 내려앉은 아버지의 거칠고도 따스한 두 손입니다. 그 손이 닿는 순간, 아들의 누더기는 수치가 아닌 용서와 회복의 상징으로 탈바꿈합니다.

이 감동적인 장면은 구약 성경 역대상 4장에 기록된 **야베스(Jabez)**의 인생 궤적과 놀랍도록 닮아 있습니다. ‘고통’이라는 저주 섞인 이름을 숙명처럼 안고 태어난 한 남자가 어떻게 이스라엘 지파 중 가장 ‘존귀한 자’로 우뚝 설 수 있었을까요? **장재형 목사(Olivet University)**는 이 극적인 삶의 반전이 일어날 수 있었던 유일한 동력이 바로 ‘기도’였다는 점을 깊이 있는 신학적 혜안으로 조명합니다.


1. 운명의 굴레를 끊어내는 기도의 힘

성경의 족보는 대개 건조한 이름들의 나열로 이어지지만, 야베스의 대목에 이르면 서술의 호흡이 달라집니다. 그의 이름은 어머니가 산고의 고통 속에서 지은 것으로, 태생부터 절망의 낙인이 찍혀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는 사회적 약자이거나 가난과 슬픔이 대물림되는 환경에 놓여 있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장재형 목사는 그의 설교를 통해 중요한 영적 원리를 제시합니다. 인간을 규정하는 것은 그가 처한 열악한 환경이 아니라, 그가 누구를 향해 무릎을 꿇느냐에 달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야베스는 자신을 옥죄는 운명에 순응하는 대신 하늘의 하나님을 향해 고개를 들었습니다.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으로 시작되는 그의 간구는 단순한 물질적 탐욕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철저한 자기 부인이자, 하나님의 개입 없이는 단 한 순간도 소망이 없다는 전적인 의탁의 고백입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품을 향해 달렸듯, 야베스는 기도를 통해 고통의 외피를 벗고 은혜의 세계로 도약한 것입니다.

2. 거룩한 야망으로 지경을 확장하다

야베스의 기도에서 가장 오해하기 쉬운 대목이 바로 “나의 지역(지경)을 넓혀 달라”는 요청입니다. 이를 단순히 부동산이나 영토의 확장으로 치부해서는 안 됩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기도를 이사야 54장의 “네 장막 터를 넓히라”는 예언적 메시지와 결합하여 해석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경’은 복음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이며,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실현되는 거룩한 통치 영역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종종 소극적인 태도를 겸손이라 착각하며 살아가곤 합니다. 그러나 장재형 목사는 누가복음 11장의 ‘밤중에 찾아온 친구’ 비유를 들어 진정한 기도의 동기를 설명합니다. 우리가 떡을 구하는 이유는 내 배를 채우기 위함이 아니라, 굶주린 채 찾아온 이웃을 대접하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지경을 넓혀달라는 기도는 “하나님, 제가 더 많은 영혼을 품고 섬길 수 있도록, 주의 복음을 더 넓은 세상에 전할 수 있도록 저의 그릇을 키워 주옵소서”라는 이타적인 선언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동기가 담긴 기도는 정체된 신앙의 담벼락을 허물고 하늘 보좌를 움직이는 강력한 동력이 됩니다.

3. 환난의 파도를 잠재우는 하나님의 손길

인생이라는 거친 바다 위에서 환난은 예고 없이 찾아옵니다. 야베스는 이 실존적인 위협을 직시했기에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성도가 이 험난한 세상에서 평안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는 것뿐임을 강조합니다.

인간이 제아무리 견고한 성벽을 쌓을지라도 세월과 고난의 파도 앞에서는 무너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기도로 세워진 영적 성벽은 환난 속에서 더욱 단단해집니다. 기도는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하늘의 풍성한 자원을 이 땅의 삶으로 끌어오는 거룩한 통로입니다. 기도를 멈추는 것은 영적인 호흡을 중단하는 것과 같아서, 결국 영혼의 갈증과 삶의 위축을 가져옵니다. 반면, 야베스처럼 깨어 부르짖는 자에게 삶의 현장은 날마다 기적의 현장이 됩니다.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는 성경의 마침표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약속입니다.


결론: 당신의 기도가 역사를 바꿉니다

장재형 목사가 전달하는 야베스의 기도는 오늘날 영적 무력감에 빠진 그리스도인들에게 던지는 강력한 도전입니다. 우리는 평생 고통의 이름표를 달고 환경 탓만 하며 살 것인지, 아니면 기도로 운명의 흐름을 바꾸어 ‘존귀한 자’의 반열에 설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렘브란트의 화폭 속 아버지가 아들을 어루만지며 모든 수치를 덮어주었듯, 기도는 하나님의 거룩한 손길이 우리 삶에 닿게 하는 가장 확실한 수단입니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의 지경을 넓히고 환난을 극복하는 기도를 시작하십시오. 하나님은 이미 당신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실 모든 준비를 마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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