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을 벗고 생명의 빛으로: 경건의 모양을 넘어 능력이 흐르는 삶 – 장재형 목사 (Olivet University)

지독한 어둠이 내려앉은 밤, 렘브란트의 명화 **’돌아온 탕자(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를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화면 중앙, 초라하게 해진 옷을 입고 아버지의 품에 얼굴을 묻은 아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의 한쪽 신발은 벗겨져 있고 다른 한쪽은 겨우 발에 걸쳐져 있습니다. 화려했던 과거의 ‘모양’은 모두 사라지고 오직 비참한 실존만이 남은 순간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 아들의 등을 어루만지는 아버지의 거칠고 따뜻한 손을 통해, 그림 전체에는 형언할 수 없는 평안과 생명력이 흐릅니다. 아들이 비로소 자신의 화려했던 껍데기를 내려놓았을 때, 아버지의 ‘능력’인 무조건적인 수용과 사랑이 시작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은 어쩌면 탕자가 집을 떠날 때 입었던 화려한 옷과 같은 ‘모양’에만 집착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겉으로는 경건해 보이나 속은 공허한 현대인의 영적 기갈 앞에서, 장재형 목사는 디모데후서 3장의 엄중한 경고를 우리 시대의 거울로 제시합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전했던 마지막 때의 징조들은 단순히 타인을 비난하기 위한 칼날이 아니라, 우리 내면의 부패를 수술하기 위한 성령의 메스입니다.

자아라는 우상의 파쇄, 첫사랑의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

디모데후서 3장은 마지막 때의 고통하는 이유로 가장 먼저 ‘자기를 사랑함’을 꼽습니다. 현대 사회는 SNS라는 정교한 무대 위에서 완벽한 자아를 큐레이션하고 타인의 인정을 갈구하게 만듭니다. ‘좋아요’의 개수로 존재의 가치를 증명하려는 시도는 결국 영혼을 더 깊은 고독으로 밀어넣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현상을 도덕적 결함으로 치부하기보다 ‘영적 진공 상태’의 필연적 결과로 해석하는 신학적 통찰을 보여줍니다. 하나님 사랑이 빠져나간 자리는 반드시 나 자신에 대한 병적인 집착과 돈이라는 우상이 차지하게 된다는 논리입니다.

이 영적 진공을 채우는 유일한 방법은 외부의 환경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중심의 축을 이동시키는 것입니다. 장재형 목사의 설교는 우리에게 ‘첫사랑의 복원’을 촉구합니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할 때 비로소 돈도, 명예도, 자아도 제자리를 찾게 됩니다. 렘브란트의 그림 속 탕자가 아버지의 품이라는 중심을 회복했을 때 비로소 참된 안식을 누렸듯, 우리 역시 자기 숭배의 제단을 허물고 복음의 지성소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것이 경건의 모양이라는 가식에서 벗어나 능력을 회복하는 첫걸음입니다.

원통함의 사슬을 끊고 흐르는 용서의 실개천

바울이 나열한 인간의 악덕 목록 중 가장 깊은 골짜기를 형성하는 것은 ‘원통함을 풀지 않는 마음’입니다. 이는 겉으로는 미소를 지을지언정 내면에는 오래된 상처의 독을 품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러한 마음은 경건의 능력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자물쇠가 됩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문처럼, 우리가 타인을 용서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것은 영적인 모순이자 기도의 통로를 스스로 막는 행위입니다.

여기서 장재형 목사는 용서를 감정의 영역이 아닌 ‘주권의 양도’라는 관점에서 정의합니다. 내가 심판관의 의자에 앉아 상대를 정죄하기를 포기하고, 그 자리를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결단입니다. 세리가 성전 구석에서 가슴을 치며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고백했을 때 임했던 그 강력한 은혜는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지 않는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입니다. 이처럼 십자가의 복음은 나의 의가 완전히 무너진 폐허 위에서 비로소 경건의 능력을 꽃피우기 시작합니다.

기록된 문자를 넘어 삶을 재배치하는 성령의 권능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는 선언은 신앙인들에게 익숙한 명제입니다. 그러나 장재형 목사는 성경 묵상이 단순히 지적 유희나 위로의 문장집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말씀은 우리의 삶을 교훈하고 책망하며 바르게 하는 ‘현장 매뉴얼’이자 권능이어야 합니다. 성경의 텍스트가 나의 구체적인 일상 속에서 순종이라는 행위로 번역될 때, 비로소 경건은 모양의 껍질을 깨고 능력의 실체로 드러납니다.

진정한 경건의 능력은 화려한 종교적 퍼포먼스에 있지 않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골방에서 무릎을 꿇는 결심, 모두가 이익을 위해 진실을 가릴 때 손해를 감수하고 정직을 택하는 용기, 나를 아프게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축복을 비는 기적 같은 변화 속에 능력이 깃듭니다. 장재형 목사의 표현대로 “경건은 모양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자리의 일치”이기 때문입니다. 공개적인 신앙 고백과 사적인 공간에서의 선택이 일치될 때, 우리 존재의 밀도는 성령으로 충만해집니다.

닻을 내린 기억의 신학, 일상을 바꾸는 작은 순종의 힘

마지막으로 바울은 디모데에게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권면하며 ‘기억’의 중요성을 일깨웁니다. 혼란한 시대 속에서 우리를 지탱하는 힘은 새로운 유행이 아니라 이미 우리에게 주신 진리의 말씀입니다. 기억은 마음의 닻입니다. 폭풍이 몰아쳐도 닻이 견고하게 내려져 있다면 배는 표류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어떤 대가를 치르셨는지를 끊임없이 기억하는 성경 묵상의 습관이 흔들리지 않는 신앙의 지속력을 만듭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거대한 신학적 담론을 오늘 하루의 작은 루틴으로 연결하기를 권합니다. 잠들기 전 30초의 축복 기도, 갈등이 있는 이에게 건네는 평안의 메시지 한 줄, 아침 5분의 말씀 읽기. 이런 소박한 순종의 결들이 모여 한 사람의 체질을 바꾸고, 나아가 도시의 공기를 바꿉니다. 경건의 모양은 우리를 피로하게 하지만, 경건의 능력은 우리를 감사와 기쁨으로 인도합니다. 오늘 당신의 일상 위에 십자가의 사랑과 진리가 입맞추는 작은 순종의 한 줄을 그어보시길 바랍니다. 그 한 줄이 당신의 오늘을 바꾸고, 영원한 내일의 길을 여는 시작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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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의 화폭에 담긴 복음과 야베스의 역전승: 장재형 목사(Olivet University)의 강해를 중심으로

예술가 렘브란트가 생의 끝자락에서 완성한 불후의 명작 **『탕자의 귀향』**을 가만히 응시해 보십시오. 화면 속 아들의 모습은 처참함 그 자체입니다. 다 해진 옷가지와 벗겨진 신발, 그리고 고난의 세월을 대변하듯 빠져버린 머리카락은 그가 겪어온 삶의 무게를 여과 없이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 비극적인 풍경을 완성하는 것은 아들의 어깨 위에 살포시 내려앉은 아버지의 거칠고도 따스한 두 손입니다. 그 손이 닿는 순간, 아들의 누더기는 수치가 아닌 용서와 회복의 상징으로 탈바꿈합니다.

이 감동적인 장면은 구약 성경 역대상 4장에 기록된 **야베스(Jabez)**의 인생 궤적과 놀랍도록 닮아 있습니다. ‘고통’이라는 저주 섞인 이름을 숙명처럼 안고 태어난 한 남자가 어떻게 이스라엘 지파 중 가장 ‘존귀한 자’로 우뚝 설 수 있었을까요? **장재형 목사(Olivet University)**는 이 극적인 삶의 반전이 일어날 수 있었던 유일한 동력이 바로 ‘기도’였다는 점을 깊이 있는 신학적 혜안으로 조명합니다.


1. 운명의 굴레를 끊어내는 기도의 힘

성경의 족보는 대개 건조한 이름들의 나열로 이어지지만, 야베스의 대목에 이르면 서술의 호흡이 달라집니다. 그의 이름은 어머니가 산고의 고통 속에서 지은 것으로, 태생부터 절망의 낙인이 찍혀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는 사회적 약자이거나 가난과 슬픔이 대물림되는 환경에 놓여 있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장재형 목사는 그의 설교를 통해 중요한 영적 원리를 제시합니다. 인간을 규정하는 것은 그가 처한 열악한 환경이 아니라, 그가 누구를 향해 무릎을 꿇느냐에 달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야베스는 자신을 옥죄는 운명에 순응하는 대신 하늘의 하나님을 향해 고개를 들었습니다.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으로 시작되는 그의 간구는 단순한 물질적 탐욕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철저한 자기 부인이자, 하나님의 개입 없이는 단 한 순간도 소망이 없다는 전적인 의탁의 고백입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품을 향해 달렸듯, 야베스는 기도를 통해 고통의 외피를 벗고 은혜의 세계로 도약한 것입니다.

2. 거룩한 야망으로 지경을 확장하다

야베스의 기도에서 가장 오해하기 쉬운 대목이 바로 “나의 지역(지경)을 넓혀 달라”는 요청입니다. 이를 단순히 부동산이나 영토의 확장으로 치부해서는 안 됩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기도를 이사야 54장의 “네 장막 터를 넓히라”는 예언적 메시지와 결합하여 해석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경’은 복음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이며,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실현되는 거룩한 통치 영역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종종 소극적인 태도를 겸손이라 착각하며 살아가곤 합니다. 그러나 장재형 목사는 누가복음 11장의 ‘밤중에 찾아온 친구’ 비유를 들어 진정한 기도의 동기를 설명합니다. 우리가 떡을 구하는 이유는 내 배를 채우기 위함이 아니라, 굶주린 채 찾아온 이웃을 대접하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지경을 넓혀달라는 기도는 “하나님, 제가 더 많은 영혼을 품고 섬길 수 있도록, 주의 복음을 더 넓은 세상에 전할 수 있도록 저의 그릇을 키워 주옵소서”라는 이타적인 선언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동기가 담긴 기도는 정체된 신앙의 담벼락을 허물고 하늘 보좌를 움직이는 강력한 동력이 됩니다.

3. 환난의 파도를 잠재우는 하나님의 손길

인생이라는 거친 바다 위에서 환난은 예고 없이 찾아옵니다. 야베스는 이 실존적인 위협을 직시했기에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성도가 이 험난한 세상에서 평안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는 것뿐임을 강조합니다.

인간이 제아무리 견고한 성벽을 쌓을지라도 세월과 고난의 파도 앞에서는 무너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기도로 세워진 영적 성벽은 환난 속에서 더욱 단단해집니다. 기도는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하늘의 풍성한 자원을 이 땅의 삶으로 끌어오는 거룩한 통로입니다. 기도를 멈추는 것은 영적인 호흡을 중단하는 것과 같아서, 결국 영혼의 갈증과 삶의 위축을 가져옵니다. 반면, 야베스처럼 깨어 부르짖는 자에게 삶의 현장은 날마다 기적의 현장이 됩니다.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는 성경의 마침표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약속입니다.


결론: 당신의 기도가 역사를 바꿉니다

장재형 목사가 전달하는 야베스의 기도는 오늘날 영적 무력감에 빠진 그리스도인들에게 던지는 강력한 도전입니다. 우리는 평생 고통의 이름표를 달고 환경 탓만 하며 살 것인지, 아니면 기도로 운명의 흐름을 바꾸어 ‘존귀한 자’의 반열에 설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렘브란트의 화폭 속 아버지가 아들을 어루만지며 모든 수치를 덮어주었듯, 기도는 하나님의 거룩한 손길이 우리 삶에 닿게 하는 가장 확실한 수단입니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의 지경을 넓히고 환난을 극복하는 기도를 시작하십시오. 하나님은 이미 당신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실 모든 준비를 마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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